"제도는 유연하되 개인의 고용은 안정된 시스템을 갖춰야 노동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flexibility)과 사회안전망이라는 안정성(security)을 합친 '유연안정성(flexicurity)' 제도를 노사가 협의하고 타협해 만들어내야 합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을 지낸 이원덕(64·사진) 이수노동포럼 회장(전 한국노동연구원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올해는 반드시 낡은 노동시장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유연성이란 고용과 해고의 자유를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 기업들은 노동조합의 동의권 남용 같은 불합리한 관행으로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는데다 장기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저성장 구조가 고착되면서 고용시장이 얼어붙은 상황이다. 이 전 수석은 "덴마크 같은 유럽 국가들도 예전에는 경직적이었지만 지금은 미국만큼 유연해졌다"면서 "제도가 유연해도 근로자들의 일자리는 안정된 사회"라고 설명했다. 안정성 차원에서는 근로자들에게 안정된 소득과 고용을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를 위한 사회안전망 확충 방안으로 그는 임금 프리미엄을 통한 차별 개선을 제안했다. 이 전 수석은 "비정규직은 고용안정이나 복지에서 혜택을 받지 못하는데 일에 대한 대가에는 차이가 없어야 하므로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는 임금으로 보상해주는 게 옳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현재 임금 차이가 3배 가까이 된다. 이는 곧 단순히 취약계층에게 소득을 이전해주는 복지가 아니라 일과 능력개발을 통한 이른바 생산적 복지로 바꿔나가는 지혜가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얘기다. 노사관계뿐 아니라 인적자원개발(HR) 전문가인 이 전 수석은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노사 모두 변해야 할 필요성과 정부 노동정책의 방향에 대한 혜안을 과감하게 제시했다.
좋은 일자리 1,000만개 수준 늘려야
인력 미스매치는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중소기업들은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인데 구직자들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정작 사람을 뽑고 나면 기업 눈높이에 맞지 않아 재교육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이러한 미스매치는 일자리 부족에서 나왔을까. 이 전 수석은 "경기가 나쁜데도 중소기업은 인력난이 심하다"면서 "전체 일자리 수가 부족하지는 않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는 "대기업·금융·공공 등 모든 젊은이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일자리는 300만개 수준에 불과한데 이를 1,000만개까지 늘리지 않고서는 취업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11월 기준 전체 취업자 수가 약 2,600만명이니 그 중 12%만 양질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생의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청년들은 대학 졸업과 함께 까마득히 높은 일자리에만 매달리다 보니 미스매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의 해법으로 이 전 수석은 "기업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더 늘릴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1차적으로 고용의 걸림돌이 되는 여러 규제장치를 완화해 기업들이 자연스레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가 최근 국무조정실 주재로 민관합동회의를 열어 '규제 기요틴(단두대)' 과제 153건 중 114건을 폐지하거나 완화하겠다고 밝혔지만 민감한 핵심 현안인 고용노동 부문과 수도권 규제 완화는 아예 빠져버렸다.
노동시장 양극화의 원인으로 이 전 수석은 "일부에서는 굉장한 혜택을 누리고 그 부담은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에 전가한다는 데 있다"고 진단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대기업·정규직·유노조 계층은 여러 장치에 의해 고용안정과 높은 임금, 복지혜택을 누리는 반면 비정규직은 고용불안과 낮은 임금으로 격차가 빠르게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이 전 수석은 특히 "대기업 노조가 만든 단체협약과 취업규칙이 고용을 경직적으로 만든 배경"이라며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규제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17위다. 법적 규제로는 평균 정도로 보이나 대기업 정규직 유노조 사업장에서 과도한 단체협약과 취업규칙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놓아 유연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 전 수석은 "수출주도형 국가인 우리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미국이나 일본 같은 국가와 비교할 때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더 떨어져 보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이 고용에 부담을 갖는 것은 연공서열식 호봉제를 주로 취하는 임금체계도 주요인이다. 이 전 수석은 "임금체계를 유연하게 바꾸면 기업들이 근로자를 퇴출시키려는 유혹이 줄어들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말해 생산성과 관계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임금이 오르는 체계여서 기업들로서는 생산성보다 임금 수준이 높다고 판단되는 40대 중반 이후가 되면 젊은 세대로 고용을 바꾸려 하는 욕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40대 중후반 이후에는 생산성과 임금 간 격차가 확대되지 않도록 노조가 임금체계만큼은 양보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고 피력했다. 60세 정년을 앞뒀지만 개별 사업장마다 지지부진한 임금피크제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미다.
근로시간 단축·생산성 향상 제도적 병행
현안으로 들어가면 당장 주 68시간인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장시간 근로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지만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논의는 여야·노사 갈등으로 요원한 상황이다. 이 전 수석은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하되 기업이 대처할 수 있도록 단계적으로 도입해야 하고 가산수당을 중복할증(100%)해 지급하는 문제는 시대에 맞게 조정해주는 게 낫다"는 의견을 밝혔다. 기업들이 일시에 부담해야 하는 추가 임금이 크기 때문에 휴일근로 할증임금(50%)만 지급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이 전 수석은 "근로시간 단축과 함께 근로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가 병행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대표적으로 근로시간이 줄어도 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보다 많이 활용되고 사무직은 재량근로시간제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을 했다.
고용률 지표 매몰되면 노노갈등 우려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는 고용률 70% 달성이다. 최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해 11월까지 평균 고용률이 65.4%로 처음으로 65%대에 도달했다며 조심스레 낙관적인 견해를 내비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 전 수석은 "고용률을 국정의 최고 주요지표로 내세운 것은 잘했다고 본다"면서도 "다만 고용률이라는 양적 지표에 매몰되면 자칫 노노 간 갈등을 유발하는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고용을 중시하되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더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취지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에 대해서는 "우리는 선진국과 반대로 기간제가 많고 시간제가 적은데 직장과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간제 일자리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시간제도 정규직과 같이 고용이 안정적이고 복지혜택 같은 사회안전망 혜택을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고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이와 함께 풀타임으로 일하기 힘든 고령층이 젊은층이 쉬는 주말이나 야간에 시간제로 근무하면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과 직장을 병행하는 일본의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다양한 고용형태와 근무형태를 만들어가는 게 일자리 확대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업은 직원 존중 철학 확실히 보여줘야
이 전 수석은 특히 "정규직을 대체하는 시간제 일자리를 기업이 너무 남발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며 "기업에 사람과 직원을 존중하는 가치와 철학이 있으면 근로자도 유연화나 고용조정에 반대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외환위기의 여파로 해고에 대한 악몽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계는 정부가 추진하려는 성과 낮은 근로자의 전환배치를 비롯한 '노동이동성' 제고 방안에 대해 해고를 쉽게 하려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한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능력개발과 본인에게 맞는 부서업무로의 배치전환, 임금조정, 전직지원 서비스 등으로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기업과 사회문화로 정착돼야 갈등이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다. 이 전 수석은 "지금 위치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근로자가 다른 자리에서도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며 "열의를 가지고 성과를 발휘해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직장으로 근로자가 옮길 수 있게 노조와 기업, 사회 시스템 모두 도와주는 게 맞다"고 발상의 전환을 강조했다.
마침 인터뷰 날이 노사정위에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원칙과 방향' 합의를 이룬 다음 날이었다. 이에 대한 견해를 묻자 이 전 수석은 "구체적인 개혁방향이 나오지 않아 미흡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고쳐나간다는 접근방법에 있어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는 의미가 있고 이 기조를 꼭 지켜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또 "지금의 낡은 노동시장 틀로는 미래를 열어갈 수 없고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노동시장 개혁이 산업화·민주화 이후 국민의 역량과 에너지를 국가발전으로 모아 새롭게 개척하는 길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시기를 놓치지 말아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논란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빨리 노사정위법을 통과시켜 비정규직·중기·청년·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참여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현 단계에서는 한국노총이 취약계층의 의견을 수렴한 뒤 대변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분을 위원으로 추천해 사회적 대화를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약력 △1951년 경북 성주 △1970년 경북고 졸업 △1975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80년 충남대 경제학과 부교수 △1987년 미 보스턴대 경제학박사 △1988년 한국노동연구원 동향분석실장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수석 전문위원 △2000년 노동연구원장 △2003년 노사관계학회장 △2004년 대통령 비서실 사회정책수석비서관 △2006년 경원대(현 가천대) 석좌교수 △2006년 직업능력개발원장 △2008년 삼성경제연구소 고문 |
"사람이 희망"… 경쟁력 좌우하는 인적자원 개발 힘써 ■ 이 전 수석의 좌우명 "사람이 희망입니다." 이원덕 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은 인터뷰 내내 '사람'을 언급했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그의 좌우명이자 추구하는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 전 수석은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며 건강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며 "그리고 누구나 꿈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노력하면 그 꿈이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사회가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는 말이지만 비정규직이 600만명을 넘어선 현재 우리 사회, 2년 가까이 일한 뒤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해고돼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큰 울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개인의 능력이 존중되는 국가가 돼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인 양극화 해소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노사관계 선진화 모두 결국은 사람이 핵심에 있다. 그는 "근로자가 자신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지 못하고 능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못 받는 사회라면 생산성이 제대로 올라가기 힘들다"고 밝혔다. 더욱이 이 전 수석은 '사람이 희망'이라는 가치에 대해 이 시대 새로운 발전전략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사람에 대한 투자가 국가와 지역과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라고 말했다. 이 시대 국가경쟁력의 핵심은 인적자원(HR)이고 국내 기업들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생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적자원개발 부문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인적자원 분야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이 전 수석은 학계와 국책연구기관인 노동연구원 수장을 거쳐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정책수석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거시적인 안목으로 시대의 흐름을 이끌었다. 노사관계 전문가로 특히 집단적 노사관계에 조예가 깊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민경제자문회의와 사람입국·신경쟁력위원회 등 각종 정부위원회에 활발히 참여해 경험이 풍부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사회통합위원회 산하 계층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인적자원정책 시스템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한 데는 이 전 수석의 영향이 컸다. 그는 노동연구원장 시절 "2004년 대통령 신년사에 사람입국 선언을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사회정책수석 때는 대통령에게 인적자원개발을 국가 핵심 어젠다로 삼고 추진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국가인적자원위원회를 만들고 인적자원혁신본부 방안을 아이디어로 낸 것도 그였다. 이 전 수석은 "핀란드와 덴마크·스웨덴 등이 높은 복지수준과 국가경쟁력을 확보한 핵심 이유는 평생교육을 통한 인적자원개발"이라고 피력했다. 현재는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에 이어 이수노동포럼 회장을 맡고 있다. 이 포럼은 노사관계학회 등 노동 관련 학회장 출신과 고용노동부 및 산하단체장 OB(퇴직자)들이 한달에 한번씩 모여 노동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전 수석은 "이념에 있어서의 중도와 자산에 있어서의 중산층이 다 무너진 사회에서 새 균형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균형과 중용적인 시각이 구심점이 되는 게 필요하다"며 "위기에 강한 선진국 사례를 봤을 때도 복지와 일하는 것의 중용,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고용안정성의 중용 등에서 대타협을 이뤄내 사회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역설했다. |
사진=이호재기자
대담=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