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勝雄의 휴먼칼럼] 클린턴의 岐路

[金勝雄의 휴먼칼럼] 클린턴의 岐路 09/15(화) 19:03 서울경제는 매주 수요일자에 「金勝雄의 휴먼칼럼」을 싣습니다. 필자 김승웅씨는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주불 특파원, 시사저널 및 문화일보 주미특파원을 지내며 해외취재에 필명을 날린 언론인입니다. 예지가 번득이는 그의 글은 각박한 현실을 뛰어넘어 우리의 시야를 좀도 멀고 넓은 곳으로 이끌 것입니다. 클린턴에 관한 「스타보고서」를 오히려 담담한 심정으로 읽는다. 경악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이 「예상」에 대해 나는 남다른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워싱턴에서 6년을 살다 왔다. 그것도 백악관과 두 블럭 떨어진 내셔널프레스빌딩에 사무실을 두고 가장 지근거리에서 클린턴을 주시해 온 특파원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워싱턴 근무가 시작된 92년 8월 역시 그의 백악관 입성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만6년을 나는 결국 클린턴 한 사람만 지켜보다 귀국한 셈이다. 그의 성(性)보고서를 읽고 불쑥 파리에서 만난 한 여자집시의 말을 떠올린다. 파리 대학가인 라틴 쿼터(Quartier Latin) 뒷골목에서 춤으로 빵을 벌던 여자집시가 들려 준, 술취하는 이유에 관한 「명언」이다. 집시 마리 끌로드. 으젓한 불어 이름까지 지닌 그 집시는 매일 밤 왜 그토록 고주망태가 되느냐는 내 질문에 『슬퍼지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대답같기도 했으나 솔직하게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라기 보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걸 표절했다 싶어 「너는 역시 타고난 집시구나」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날 새벽 취중 운전대를 잡고 귀가 길에야 그녀의 대답이 내게 감동으로 와 닿았고, 또 이런 감동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귓가에 생생하다는 것, 더 심하게는, 집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영험(靈驗)한 표현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지금 미 의회에서 탄핵 여부의 뇌관이 되고 있는 클린턴 대통령의 바람끼만 해도 그렇다. 여자라면 견적필살(見敵必殺)로 마감하는 클린턴의 바람끼를 놓고 미 전역이 들끓고 있지만 그 바람끼의 원인을 정확히 말하는 사람은 없다. 성(性)중독증 환자이기 때문으로 미 언론이 그럴싸히게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지만 파리의 집시가 전한 「슬퍼지기 위해」 수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클린턴이 여자에 취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나의 워싱턴 6년은 따라서 클린턴의 바람끼와 그 원인규명을 위한 탐색기간이었다. 그리고 지난 5월 귀국길에 미 서부 관광지 그랜드캐년에 들렀을때 그곳에서 관광객 운반용으로 사육되고 있는 노새(Mule)한테서 답을 찾아낸 것이다. 클린턴이 여자에게 취하는 건 한마디로 「기로(岐路)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클린턴 특유의 성격 때문이다. 그랜드캐년의 노새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관광객을 태운 노새떼들은 행진할 경우 반드시 길 모퉁이 벼랑끝을 택해 걷고 있었다. 벼랑 밑 수백m 아래로는 싯누런 콜로라도 강이 도도히 흘러 관광객들은 감히 쳐다 볼 엄두도 갖지 못했다. 담이 약한 관광객은 아예 노새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갈 수 밖에 없다. 바로 클린턴이 그렇다. 그는 매사에 기로에 서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잎이다. 이런 직성은 네명의 의붓아버지를 차례로 겪으며 체질화된 생존 본능, 또 그 시절의 밑바닥을 깊이 적시고 있는 고향 아칸소주의 매우 이질적인 두 도시 호프와 핫 스프링스의 분위기와 결코 무관치 않다. 그는 고향 마을 호프에서 신념, 교육, 인종적 포용에 관해 배운다. 그러나 성장기를 보낸 이웃 도시 핫 스프링스는 당시 시카고 갱들이 몰려와 한탕을 벌이는 도박과 아편의 소굴이었다. 이처럼 선·후천적으로 기로에 익숙했고, 기로에 서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한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아내 힐러리와의 결합 역시 또다른 기로였다. 예일대 법과대학 시절 그는 동급생 힐러리의 위인됨은 모른 채 오직 그녀의 히프만을 주시하다 불의의 역습을 당한다. 도서관 정문에서 클린턴을 기다린던 힐러리가 그에게 다그친다. 『너, 내 꽁무니만 훔쳐보고 다니는 것 다 알아. 우리 시간 낭비하지 말자. 내 이름은 힐러리야, 힐러리 로댐』 둘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된다. 선택이고 분별이고가 없었다. 이번 스타검사의 클린턴 성보고서는 그런 의미에서 클턴이 겪은 기로의 모음집이다. 오직 성(性) 문제에만 국한된 기로였지만. 탄핵은 미 합중국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클린턴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탄핵보다는 차라리 유명한 정신과 의사를 소개함이 정부가 베풀 수 있는 최선책이라는,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의 논객 짐 호그랜드의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언론인> 필자 약력 43년 충남 금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업 한국일보 주불특파원 시사저널 편집국장, 주미특파원 문화일보 주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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