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리인상 기대에 따른 강달러 기조와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의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의 합동공세 속에 일본 엔화가 '1달러=120엔' 영역으로 진입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금 같은 엔저 추세라면 120엔도 '통과점'에 불과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난 2011년 10월 달러당 75엔대까지 치솟은 지 3년여 만에 무려 45엔이나 떨어진 엔화가치가 어디에서 바닥을 볼지 시장의 눈높이는 점차 낮아지고 있다.
4일(현지시간) 뉴욕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장중 120.25엔까지 올라(엔화가치 하락) 2007년 7월 이후 7년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뒤이어 5일 도쿄외환시장에서도 엔화는 달러당 장중 120.10엔을 기록하며 7년 만에 환율이 120엔대로 올라섰음을 시장에 재확인시켰다.
10월31일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 발표 이후 가파른 엔저가 진전되는 사이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져온 달러당 120엔의 벽이 깨지자 시장에서는 다음 저지선으로 2007년 연중 환율 최고점인 124.14엔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 역시 수주 안에 깨질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처럼 엔화가치를 가파르게 떨어뜨리는 가장 큰 요인으로는 미일 간 통화정책의 엇박자가 꼽힌다. 경기회복세를 반영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인상 시기를 앞당기는 반면 일본은 경기부진으로 대규모 양적완화를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시장의 일반적 관측이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 아베노믹스의 지지기반을 다진 아베 총리가 오는 2017년 4월로 미뤄진 소비세율 2차 증세 시기까지 어떻게든 경기를 되살리려 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일본이 떠안은 대규모 무역적자도 엔저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 1∼10월 일본이 역대 최악인 11조엔 이상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면서 원자재 수입을 위해 외환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 고질적 엔저 요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국내의 정치적 요인도 한몫을 했다. 당초 시장에서는 14일 총선을 앞둔 아베 정부가 과도한 엔저에 따른 정치적 부담 때문에라도 달러당 120엔선을 지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여당이 총 475석인 의석 가운데 300석 이상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며 아베노믹스를 이어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오히려 환율을 끌어올렸다.
환율 120엔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의 자동차·전자업체 등 제조 대기업들의 실적향상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높아졌다. 니혼게이자이는 앞으로 환율이 1달러=120엔대에서 정착한다는 전제하에 주요 수출기업 10곳의 올 회계연도(2014.4~2015.3) 영업이익을 추산한 결과 전년도 대비 9,000억엔(약 8조3,600억원)의 이익증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5일 전했다. 이 중 환율의 영향을 크게 받는 주요 6개 자동차 업체들이 누리는 이익증대분만도 약 8,000억엔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때마침 유가가 하락하는 바람에 엔저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 부담도 어느 정도 상쇄되고 있다. 다이와증권은 앞서 환율이 달러당 120엔을 유지할 경우 올 회계연도 경상이익률이 당초 예상치인 8%를 훌쩍 웃도는 13%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러야 올해 말 정도로 예상됐던 120엔선 돌파시점이 앞당겨지면서 엔화가치에 대한 시장 전문가들의 눈높이는 한층 낮아졌다. 니혼게이자이는 미즈호은행과 SMBC프렌드증권 등은 내년 말 엔화가 달러당 130엔까지 하락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노무라증권도 125~128엔을 내다본다고 전했다. 당장 다음주에 열리는 미 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 조기인상이 시사될 경우 내년 초까지 125엔에 도달할 가능성도 일각에서는 제기된다.
스위스쿼트의 수석 애널리스트인 루크 루옛은 "120엔에 이어 124.14엔에서 강한 저지선을 만나며 엔화가치 하락 압력이 줄어들 수 있지만 엔저 기조는 장기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