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26> 가련한 여주인공 놀이?


얼마 전 지인이 황당한 이유로 누군가와 절교를 했답니다. 연애상담을 하다가 빚어진 사건인데요. 정황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오빠, 내가 실은 한때 만나던 남자가 있는데, 대학교 동기였는데 얼마 전 나 때문에 정신과에 다니게 되었대요.” 아는 동생에게 이 전화를 받은 지인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당사자에겐 가슴 아픈 일 일 텐데, 여러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닌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정곡을 찔러 줬다고 하네요. “너는 지금 정말 그 친구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누군가가 아직도 너를 좋아해 준다는 심리를 즐기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 줄 용의도 없고.” 지극히 현실적인 분석이었습니다. 전화를 한 상대방은 여러 가지 복잡한 심리를 갖고 있었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상대방이 자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이 불편했겠죠. 그러나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시리다면 고이 간직해 뒀다가 둘이서만 해결했어야 맞는 일입니다. 그런 사연을 굳이 현재의 남자친구도 아닌 누군가에게 드러냈다는 것은 일종의 인정욕구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는 이만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 난 평범하지 않다. 이토록 나를 연모해 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마음인 것이죠.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호네커는 인간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인정투쟁’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해 주고 높게 평가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싸움과 투쟁으로까지 이어진다니,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상대방이 본인과의 일로 고통받고 있는데도, 그것을 스스럼없이 타인들과 공유한다는 겁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비극 속 여주인공’ 심리입니다. 로미오의 마음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고 거절하려 했던 줄리엣처럼, 이몽룡을 떠나보내려 했던 성춘향에 스스로 빙의해 자신의 일생을 로맨틱하게 덧칠하고 싶은 겁니다. 그것도 타인의 절절한 비극을 소재로 써먹어 가면서요.

우리네 연애담에는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랑, 또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썸’ 때문에 고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도 많지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상대방의 고뇌를 대화 소재로 써먹는 ‘갑질’ 심리 역시 존재합니다. 앞서 일화에서 언급한 남자는 상대방 여자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다행히도 기자의 지인은 이 일화 속 여자분과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잔인함을 로맨틱함으로 치장하는 그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요. 저 같아도 그럴 것 같습니다. 서로가 소중하고 많은 것을 나눠주어도 모자라게만 느껴지는 과거의 연인 사이를 갑-을 관계로 치환하는 것은 치졸합니다. 연애담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대화 소재임엔 틀림없지만 가끔은 침묵이 금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이들은 왜 이리 많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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