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3월11일] 페리, 2차 訪日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거대한 ‘구로센(黑船)’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피난 길을 떠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1854년 3월11일의 일이다.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함대가 에도만에 도착한 것은 두번째. 1853년 7월 첫 방문에서 요구한 ‘개항’의 확답을 받으러 온 참이다. 일본인들은 ‘1년 후 다시 올 때까지 가부를 결정하라’는 통고를 남기고 떠난 페리의 함대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데 놀랐다. 군함도 4척에서 7척으로 불어났다. 겁에 질린 일본인들에게 페리는 ‘일본 국왕과 쇼군에게 보내는 미 합중국 대통령의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철도와 기차 모형, 전신기와 책, 포도주와 위스키를 접한 일본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리는 권총사격 시범까지 보였다.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허수아비 왕 대신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해온 쇼군 정부는 3월31일 미국과 가나가와(金澤) 화친조약을 맺었다. 개항과 최혜국 대우가 골자. 화친조약은 반발을 불렀다. 쇼군 정부에 맞설 기회만 노리던 조슈와 사쓰마 등 일부 지방은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쇼군 타도를 부르짖었다. 내전의 위기는 쇼군이 권력을 왕에게 반환하는 것으로 수습되고 쇄국파는 적극적인 개화파로 변했다. 메이지왕부터 상투를 잘랐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것은 중급 이하 사무라이 그룹. ‘후대에는 유럽에 뒤지지 않는 강대국이 되리라’는 그들의 꿈은 생전에 이뤄졌다. 서구제국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열강의 하나로 대우했다. 1921년 워싱턴 해군조약 체결시에는 세계3강으로 대접받았다. 일본은 페리에게 배운 수법을 조선에 써먹었다. 강화도조약(1876년)은 페리의 복사판이다. 일본의 융성은 조선 망국을 앞당겼다. /권홍우ㆍ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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