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은 지난 48년 7월17일 헌법 제정 이후 한국 현대사와 영욕을 함께 하며 현행 헌법인 87년 개헌헌법으로 자리잡기까지 9차례 개헌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의 개헌 대부분이 정당한 헌법 절차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집권세력의 초법적 전횡에 의해 이뤄지는 등 비운을 겪은 탓에 ‘누더기 개헌사’라는 오명까지 안고 있다. 특히 5ㆍ16 쿠데타와 10월 유신의 와중에서는 헌법이 1년9개월간 정지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87년 10월 이뤄진 9차 개헌을 통해 마련된 현행 헌법은 6ㆍ10 민주항쟁을 통해 분출된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국민들의 강렬한 열망과 광범위한 반(反)독재투쟁에 밀려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고 있다.
87년 이전의 개헌은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에 두 차례, 4ㆍ19 혁명 후 출범한 제2공화국 때 두 차례, 5ㆍ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세 차례씩 있었다.
47년 제정된 헌법의 첫 개정은 이 전 대통령의 재집권을 위해 마련된 52년 ‘발췌개헌’을 통해 이뤄졌다. 이 전 대통령은 당시 정부통령을 직선으로 하고 단원제 국회를 양원제로 하는 개헌안을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부 국회의원을 감금한 상황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6ㆍ25 종전 이듬해인 54년 이 전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길을 트기 위해 악명높은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관철시켰다. 그 골자는 대통령 연임제 제한을 없애는 것이었다.
4ㆍ19 혁명의 열기 속에 출범한 제2공화국은 60년 6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각각 내각책임제와 3ㆍ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부 설치 근거를 위한 두 차례의 개헌을 단행했다.
이어 5ㆍ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 전 대통령은 62년 12월 권력구조를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국회를 단원제로 각각 환원하는 제5차 개헌을 밀어붙였다.
69년 10월에는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에게 3선을 허용하는 이른바 ‘3선 개헌’이 새벽 날치기로 통과됐고 이 헌법으로 치러진 71년 대통령선거에서 선출된 박 전 대통령은 72년 10월 7차 개헌을 통해 아예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는 내용의 이른바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10ㆍ26 사태와 12ㆍ12 쿠데타 등을 거쳐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80년 10월 대통령 간선제는 유지하면서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 도입을 골자로 한 제8차 개헌을 했다. /안길수기자 coolass@sed.co.kr
이는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의 6년 단임안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염두에 둔 통일민주당의 4년 중임제를 절충해 마련된 것으로, 당시 후보로 거론되던 `1노2김'이 모두 `완벽한 승리'를 자신하지 못해 자신들의 재출마가 가능한 다소 기형적 제도로 귀결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후 현행 헌법에 따라 87년, 92년, 97년, 2002년 4차례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개정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천부인권으로 규정하고 인권침해를 구제하기 위해헌법소원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를 두는 등 인권보장 측면에서는 거의 완벽한 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 5년 단임제가 국회의원 임기 4년제와 맞지 않아 선거가 계속되어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권력구조 측면에서는 임기말 조기 레임덕 등 부작용이 많다는 지적이 6공 출범 직후부터 제기돼 왔다.
특히 정치적 민주화가 정착되고, 경제적 볼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21세기 정보화 시대가 개막된 현 시점에까지 87년 당시 군부독재의 종식을 위해 당시 정치권의 타협에 의해 마련된 `낡은 외투'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란 지적이 잇따라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김대중(金大中) 정부 등 역대 정권에서 계속 개헌론이 제기됐지만 개헌의 핵심 추동력이라 할 수 있는 현직 대통령의 힘이 하강기에 접어드는 차기 대선을 앞둔 시점에 제기됐고, 야당은 대선을 앞둔 `정국 교란용'이란 시각으로 이를 일축해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게 저간의 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