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저항

일본 재계의 총본산인 닛혼게이단렌(經團連)은 올해 초 정치권을 향해 폭탄선언을 했다.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헌금 알선을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93년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고 정경유착 시비가 불거지자 게이단렌은 정치헌금 알선을 폐지했다. 이후 개별기업의 정치헌금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가 10년 만에 이를 포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년부터 정치헌금을 주되 그냥 주지 않고 정당과 정치인의 업적을 평가해 이를 토대로 정치헌금을 몰아주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됐다. 정치인의 업적을 평가해 점수화하되 재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인에게 후한 점수를 주겠다는 것이다. 돈을 받는 만큼 돈 값을 하라는 얘기다. 일본은 금권정치와 정경유착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본고장이다. 게이단렌 역시 이 같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다. 그런 게이단렌이 정치자금 알선을 재개한 이유는 의외다. 정치에 대한 저항이다. 정치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재계가 정치를 리드하겠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돈이며 일 잘하는 정치인에게 이를 몰아주겠다는 게 실천 방안이다. 우리에게도 게이단렌과 같은 조직이 있다. 바로 전경련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회원사다. 이들의 모습은 지금 어떤가. 오로지 대선자금 수사의 불똥이 튀지 않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선거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도 정치권의 `봉`이었지만 그 대가는 출금조치와 압수 수색이기 때문이다. “수사대상은 정작 정치권인데 애꿎게 기업만 다치고 있다”말에서부터 “돈 주고 뺨 맞는 격”이라는 하소연까지 기업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단지 뒤편의 불평일 뿐이다. 이렇다 할 공통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한국 권력의 피라미드에서 정치권이 기업보다 한없이 위에 있는 현실에선 어쩌면 당연한 약자의 자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경제와 기업의 발목을 잡는 정치권의 개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어떤 개혁도 결코 남이 만들어주는 개혁은 없다. 자신도 몸을 담글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기업의 힘은 바로 돈이다. 지금까지 돈을 잘못 써 수난을 자초했지만 반대로 이를 제대로 쓰면 발전적인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정치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게이단렌이 내건 목표다. 다만 `청부청정(淸富淸政)`, “맑은 재물로 깨끗한 정치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젠 우리도 이런 모습을 보고 싶다. <이용택(증권부 차장) ytle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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