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곽태원(郭泰元)
어려운 때일수록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인 것 같다. 내년도 예산 편성과 관련해서 특히 말이 많았던 것은 우리의 상황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갈피를 잡기 어려운 산만한 논의 속에서도 합리적인 예산을 편성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다음에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들은 예산의 심의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첫째로 금융구조조정 비용에 대해서 한 번 더 깊은 생각이 있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금융부문이 하루 속히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IMF사태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해 오던 터였다. 이번 예산안에는 금융구조조정 비용으로 금융구조조정 채권에 대한 이자 지원액 7조8천억원만 계상 되어 있지만 부실채권매입과 예금 대지급 등에 대부분 사용될 금융구조조정 채권 64조에 대한 지급보증도 정부가 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금융기관 부실 책임을 온 국민이 떠맡아야 된다는 것이다. 때가 때니 만큼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경제를 살려야 우리모두가 산다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금융기관 부실화에 직접 관련된 당사자들에게 충분한 책임추궁을 한 것인가? 부실화의 근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관치금융의 잔재와 금융 및 기업 부문에 만현하고 있는 부패에 대해서는 어떤 대책이 있는가? 정부가 잘못 했으니까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된다. 그러나 재정이 부담하는 것은 정부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고 국민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라는 점을 납세자들이 이해했으면 좋겠다. 이번에 부실채권 문제를 해결해 주면 다시는 금융기관들이 부실해지지 않도록 하는 보장은 무엇인가? 또 높은 이자를 누려온 고리스크 상품 투자자들의 손해를 왜 가난한 납세자가 보상을 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설명되어야 한다. 구조조정에 반발하고 있는 금융기관 종사들에게는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두번째로 이번에 예산안이 지향하고 있는 재정정책의 기본 방향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 하고 싶다. 경기부양과 실업의 완화를 도모한다는 취지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일자리 제공과 경기활성화의 열쇠를 쥔 민간 기업이 소외된 상태에서 적자재정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은 한계가 있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된다. 금융기관들이 여유자금을 가지고도 기업에 자금을 융통해주지 않는 기현상의 근본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의 서투른 개입이 오히려 불확실성을 극도로 높여 놓는 결과를 가져 왔기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들을 방치한 채 재정지출만 늘린다고 해서 과연 경기가 신속하게 회복세로 반전될 수 있을 것인가? 재정이 일시적인 진통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른나 경제를 이끌고 나가는 기관차의 위치에 설 수는 없다. 서둘러 진통제를 남용하면 오히려 회복이 더 늦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국공채이자부담이 급속히 악화될 것이다. 특히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될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진통제의 투입이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 할지 불투명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국채의 과감한 발행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SOC사업의 확대 및 조기 집행에 대해서도 이의를 달아야 겠다. SOC확충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산업부문의 생산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사업의 생산성을 가장 높일 수 있는 용도에 그 돈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SOC 사업들은 당장 산업의 생산성에 큰 향상효과를 주는 것들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재정이론이 이러한 정책의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지 모르나 공급측면에서의 효율성을 무시한 수요 진작 정책은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더구나 내년 1.4분기 중에 집중적으로 이 부문예산을 조기 집행하겠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또 다른 졸속과 부실들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원론에 충실하고 멀리 보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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