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일했는데 경제난 주범 눈총
[무기력한 공직사회 이대론 안된다] 1. 실상
공직사회의 무기력증과 복지부동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근래들어서는 심각해질대로 심각해져 도저히 이대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본지가 신년특집으로 조사한 공무원 의식조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이 문제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앙부처 중ㆍ고위직 공무원의 80%가 공직자의 길로 들어선 데 회의를 품고 있으며 절반 이상이 기회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된 데는 공무원 스스로의 경쟁력 저하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권의 과도한 간섭과 현실에 맞지 않는 각종 제도 탓인 측면도 강하다.
자율과 창의가 중시되는 21세기를 맞아 공무원의 역할은 예전에 비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 어쩌면 21세기가 다 끝날 때까지도 공무원이 앞장서지 않으면 경제발전과 사회안정은 기약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에 시리즈를 통해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본뒤 그에 따른 폐해는 무엇이고, 해결방안은 없는지 등을 찾아본다.
과천 경제부처 K사무관(36). 어릴적부터 수재소리를 듣고 자란 그는 명문 S대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 엘리트 코스인 재경 관문을 뚫었다. 그의 인생에는 실패가 없는듯 보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0년 12월말. 좀체 나가지 않았던 고교 동창회에 모처럼 찾았으나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술이 오른 동창들로부터 "나라꼴이 이게 뭐냐, 좀 똑바로 해라"라는 핀잔섞인 충고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얇팍한 봉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환란의 주범으로 공무원을 매도하는 분위기가 참기 힘들 정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다니..."
그는 아직도 입신양명에 대한 미련과 새 길에 대한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다.
냄비처럼 달아오르던 벤처붐이 한풀 꺾이면서 민간인 변신의 결행은 다소 잦아들었지만 공직사회의 '탈관료행'은 휴화산이나 다름없다.
경제부처의 한 서기관은 "설문조사결과 공무원 절반이 떠나겠다고 했지만 30대 젊은 그룹의 이직체감도는 이보다는 휠씬 높다"면서 "올 봄에 예정된 해외연수기간중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미국연수기간중 변호사자격을 취득할 작정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99년과 2000년 2년동안 낙하산 인사를 제외한 '탈관료'는 어림잡아 100여명. 이중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ㆍ정보통신부등 3개 부처에서만 절반을 웃돌고 있다.
유독 3개 부처의 전직이 많은 것은 부처의 업무특성상 벤처기업의 유혹을 받기 쉽다는 점도 있지만 공무원들은 공직사회의 정체성위기에서 비롯된다는데 이견이 없다.
굴뚝산업의 위상 약화와 맞물려 조직과 역할이 크게 위축된 산업자원부 공무원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심각하다. 상공부와 통상산업부 시절 거시적 경제 정책기능이 개방화ㆍ자율화물결로 거의 사라지다시피했기 때문이다.
산자부 공보관을 역임하다 지난해 10월 벤처행을 택한 김정곤 연우엔지니어링사장은 전직의 변(辯)으로 "앉아서 변화를 강요당하기 보다는 적극적 변화의 물결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했다.
개발경제시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뛴 것처럼 디지털시대로 대변되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 한복판에 뛰어들어보겠다는 포부다.
지난 1년간 연수를 마치고 신년들어 보직을 받은 모 국장은 "시대와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공직사회는 타율적으로 변화의 바람만 탔지 스스로의 개혁과 변화의 노력은 없었다"며 "공직사회의 동요는 새 인력을 수용할만한 새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러나 "연수시설 동료공무원과의 대화주제는 단연 진로문제였다"면서 "개방형 직제와 성과급 제도는 이미 도입됐고, 연공서열에 따른 계급제 폐지도 검토되는 마당에 과연 연수후 보직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일년내내 옥좼다"고 토로했다.
99년 봄 중앙인사위원회가 독립기구로 설립되면서 정체된 공직사회에 개혁바람을 몰고와 새 시스템이 속속 도입되고 있지만 '철밥통'이 깨지는데 대한 불안감도 적지 않다는 고백인 셈이다. 이는 국장급이상 고위간부일수록 더욱 심하다.
권구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