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나는 잠시 어학연수차 호주에 갔다가 교민 한 분과 미용실을 개업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비즈니스 비자가 거절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아버지를 폐암으로 잃을 무렵 호주에서 다른 분이 함께 일해보자는 연락을 받고 1년 정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프랑스 파리에 오게 되었다.
파리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임신한 나는 출산예정일이 지난 2001년 7월 18일 새벽 1시에 딸 안젤라를 내 품에 안게 되었다.
좌충우돌 육아가 시작되고 안젤라 백일선물까지 치르는 등 시일이 어느 정도 지난 어느 날, 자금이 융통되어 결혼 초부터 꿈꿔오던 미용실을 오픈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6개월 만에 계약서에 사인하고 열쇠를 받던 날! 손 안에 있는 열쇠를 바라보며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남편은 자기 손으로 우리 가게를 만들겠다며 밤새 도면을 그리며 마냥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공사를 시작하자 동네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들이 번갈아 가며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내 이름을 딴 나의 미용실 ‘머리허니’는 2004년 6월에 태어났다.
프랑스 미용사 국가자격증에는 CAP(2급)와 BP(1급)이 있고, 미용실을 오픈하려면 BP가 필수였다. CAP는 임신했을 때 아기에게 태교하는 맘으로 준비하여 이미 획득해 놓은 상태였다. BP는 최고 자격증이었으므로 외국인들에게는 만만치 않는 관문이다.
나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처음 강한 의지와는 달리 학교에선 나는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미용대회에 출전할 것을 결심하였다.
미용대회가 열리는 곳은 프랑스 남쪽 뚤루즈란 도시였는데, 파리에서 800km나 떨어져 있는 먼 곳이었다. 나는 아무런 정보도 대회규정도 모르는 채 한 쌍의 남녀모델을 앞세워 조카 연희에게 아이를 맡기고 용감하게 뚤루즈로 떠났다. 새벽 2시 호텔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 후 대회에 참석했다. 대회 관계자는 동양 사람이 출전하기는 처음이라 신기하게 우리를 보았다.
이튿날 나는 뜻밖에도 남자 커트 부분 그랑프리라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에 대한 학교에서의 대우가 180도 변했다. 학생들은 대회에 대한 질문공세를 퍼부었고 그렇게 쌀쌀맞 던 선생님들의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해졌다. 학교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이 작은 사회에 흡수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험날짜가 두 달 정도로 바짝 다가오면서 하루하루가 숨 막히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안젤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출근하여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틈틈이 노트를 정리를 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면 저녁 9시가 되었다.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주방에는 설거지만 태산처럼 쌓여 있었고 조카는 안젤라를 통제 못해 울고 있기를 수십 번, 어머니는 그런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 쉬셨다. 설거지하고 남편이 준비한 저녁식사를 하고 책상에 앉으면 밤 12시가 되었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면 눈 커플이 저절로 스르르 감겨왔다. 시험 결과가 발표됐고, 남편은 감격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합격소식을 알려왔다.
이제 파리 한 귀퉁이에 ‘머리허니’ 한국말 간판이 있는 나의 작은 살롱에는 남편의 라이브 연주를 들으며 나의 머리 손질을 받는 손님, 지나가다 한국식 다방 커피한잔 달라며 불쑥 들어오는 손님과 동네 주민들의 즐거운 이야기, 힘든 이야기들이 넘실거린다. 오늘도 남편은 스텝이 없는 나를 도와 마지막 손님 샴푸를 끝내 놓고 기타 옆에 앉아 손톱을 정성스레 다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