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경주마 씨숫말 사랑도 질주하듯

제주 경주마육성목장
씨숫말 21마리 몸값 210억원…보약 먹어가며 '작업'
정조대찬 試情馬 분위기만 띄우고 '결정적 순간' 퇴장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 한국마사회(Korea Racing Association) 제주 경주마육성목장. 65만평의 광활한 초원 위에 미끈하게 빠진 씨숫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 주위에는 말사료를 훔쳐먹는데 맛을 들인 노루와 꿩들도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가로운 풍경과는 달리 육성목장의 봄은 1년중 가장 바쁜 계절이다. 경주마를 생산하는 암말들의 발정기는 1년중 3~7월초까지 4개월 남짓이어서 이 기간중 수태에 총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KRA가 제주 경주마육성목장에 보유하고 있는 씨숫말은 21두. 65만평의 초원에 비해 적은 숫자인 것 같지만 이들의 몸값은 총 210억원으로 한 마리에 10억원꼴이다. 이 21마리의 숫말들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육되는 모든 암말들을 나눠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국내 경주마 생산 농가 143곳중 마사회의 지원을 받고 있는 104곳이 대부분 이들의 씨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씨숫말들은 나름대로 진시황 못지 않은 향락을 즐길 만 하다. 이 들은 미국, 호주 등에서 경주마로 혁혁한 성적을 올리다, 현역에서 은퇴한 말들로 올해 열살인 ‘엑스플로잇’의 몸값은 21억원이나 한다. 엑스플로잇은 현역시절 미국에서 6전5승에 2착 1회를 기록했고, 99년에는 3관왕까지 기대됐지만 경주도중 다리를 다쳐 현역에서 은퇴했다. 육성목장에서 엑스플로잇이 특히 사랑을 받는 이유는 수태 성공률이 무려 70%로 다른 숫말들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엑스플로잇에게도 라이벌이 생겼다. 최근 미국에서 들여온 ‘볼포니’라는 숫말은 몸값 36억8,000만원에 미국에서 벌어들인 상금만 320만 달러에 달해 엑스플로잇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육성목장에 있는 말들이 모두 아방궁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곳에서 가장 우울한 구성원도 역시 숫말인데, ‘철원’이라는 이름의 시정마(試情馬)다. 시정마는 ‘정사를 시도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정사를 시도할 뿐 사정(射精)은 금지된 말이다. 이 말의 역할은 씨숫말이 암말과 교배하기 전에 암말이 거부의 표현으로 뒷발질을 하는지를 시험하고, 동시에 씨암말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람의 속옷과 비슷한 정조대를 채워 절대로 암말을 임신시킬 수는 없다. 이 들 시정마들은 암말에 올라 탔다가도, 암말이 뒷발질을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끌려 내려가는데 이들은 무려 하루에 30회나 좋았다가 만다. 시정마 철원이는 보통 암말들의 발정기가 끝나는 봄 한철 동안 씨암말을 흥분만 시켜 주고 정작 자기는 한번도 회포를 풀지 못한다. 그래서 목장은 인도적(?)차원에서 생산 시즌이 끝나면 교육용 암말중에 한 마리를 골라 회포를 풀도록 배려하고 있다. 반면 씨숫말들은 매일 암말을 품는 것은 기본이고, 하루에 2~3차례씩 간택된 암말에게 씨를 뿌려준다. 말들의 몸값이 워낙 비싸다 보니, 정작 교배가 시작되면 말들 주위에는 사육사들이 둘러싸서 씨숫말을 걷어 차지 못하게 암말의 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코를 묶기도 한다. 이현철 KRA 생산지원팀장은 “예전에는 좋은 경주마를 생산하기 위해 씨숫말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씨암말의 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견해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며 “이에 따라 씨숫말과 씨암말이 2세의 경주 능력에 미치는 영향력의 차이가 6:4정도로 까지 좁혀졌다”고 말했다. 때문에 볼포니나 익스플로잇 같은 씨숫말들은 보통 암말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세밀한 평가를 거친 우수한 씨암말들 하고 만 사랑을 나눈다. 볼포니의 경우 미국에서는 교배를 한 번 해줄 때 마다 1만 달러, 익스플로잇은 3만 달러를 받았지만 마사회는 사육 농가들을 위해 무료로 씨를 나눠주고 있다. 이팀장은 “씨숫말은 22~23세까지 활용이 가능하다”며 “그래도 체력 유지를 위해 사료에 홍삼, 마늘, 당근, 흑설탕을 첨가해 체력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힘을 빼서 암말의 자궁에 수태 시킨 정자는 330일간의 임신기간을 거쳐 망아지로 태어난다. 이렇게 생산하는 마필은 한 해 1,000여두 정도. 망아지는 태어난 후 6개월간 엄마 말과 함께 살다가 한국마사회로 팔려가는데 한 해 생산되는 마필중 마사회에서 사들이는 물량은 180마리 정도다. 마사회로 팔려간 말들은 17개월까지는 인간 친화 등 초기육성 단계를 거치고, 19~24개월령까지는 재갈을 물리고 안장을 얹는 훈련을 거쳐, 이후 36개월이 될 때까지 기승훈련을 받고 경주마로 거듭난다. 재미있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이 인공수정을 하는데 비해 말의 인공수정은 국제법으로 금지돼있다. 이는 말을 인공수정으로 번식시킬 경우 우수한 능력의 말이 무한정 생산돼 개체간의 차별화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경주마들은 철저한 혈통관리가 이루어져 보통 8대조까지의 족보를 갖고 있다. 웬만한 사람 보다 집안 내력이 잘 관리되고 있는 셈이다. 봄이면 광란의 사랑이 연출되는 마사회 제주육성목장은 연중무휴 무료로 개방하고 있으며, 특히 교배기간인 3~7월초 사이에는 사전 예약을 하면, 직원 안내하에 교배하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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