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 집중분석] 김문수 경기도지사

굽히지 않는 추진력 돋보여 민심과 소통부재 벽 넘어야
옳다면 끝까지 해내는 성격
다혈질·직설적인 화법이 소방관 전화 논란 등 만들어
국민의 세심한 변화 읽고 '말'을 아끼는 자세도 필요


김문수 경기지사가 지난해 11월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회동에 앞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손용석기자

김문수(62) 경기도지사는 새해를 뜨거운 논란 속에 맞았다. 경기도 남양주 소방공무원과 한 3분짜리 통화는 그를 도지사의 권위를 내세워 말단 공무원을 괴롭히는 인물로 만들었다. 이후 소방공무원을 만나 사과의 뜻을 전했지만 비난은 쉬 가라앉지 않는다. 한때 노동운동가였고 3선 국회의원과 재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그지만 이렇게 국민과 종종 충돌한다.

김 지사의 말이 원인인데 그의 성격과 화법, 자라온 세월이 쌓여 만들어진 습관이다. 그는 자신이 노력한 결과가 말 실수에 묻히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반면 그의 말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그의 특징이라는 비판도 있다.

◇"나에게는 아직 유교적 잔재가 남아 있는 것 같다"=그는 지난 1951년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태어났다. 1976년까지 서당이 존재했던 경주 김씨 집성촌이었다. 김 지사 역시 서울대 경영대에서 제적된 1971년 고향에 돌아와 서당에 다시 다녔다. 그는 고향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 동네는 쥐뿔도 없으면서 아직도 서당이 남아 있는 양반동네라는 자부심만 가졌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아직도 유교적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게 사람들과 어울릴 때 조금 안 좋게 작용한다는 것을 느낀다."

김 지사의 억양은 지금도 경북 사투리가 강하게 있다. 화법은 직설적이며 성격은 다혈질에 가깝다. 이것이 합쳐져 딱딱한 인상을 만든다. 그가 남양주 소방공무원과 한 통화 녹취록을 들어보면 처음에는 부드럽게 대화를 시작했고 장난스럽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한다=김 지사는 명문인 경북고를 나왔는데 학교에서 고취시킨 엘리트 의식 덕에 나라의 미래가 자신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물론 어릴 때 읽은 유교경전과 꼿꼿했던 마을 분위기 때문에 그는 '내가 옳다고 확신하면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됐다.

그는 고3 때인 1969년 대구에서 처음으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아무리 교과서를 읽어봐도 3선 개헌은 나쁜 것이라며 주장하는 바람에 남들보다 엄한 무기정학 처분을 받는다.

그가 남양주 소방공무원과의 전화통화에서 "내가 도지사인데 당신 이름이 뭐냐"고 9번이나 이름을 밝히라고 요구했던 것도 공무원의 기본이 안 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공무원에게 전화했을 때 공무원은 당연히 관등성명을 말하게 돼 있다. 하물며 소방서는 당연히 소속을 밝히고 용건을 말해야 하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민심의 세심한 변화도 읽고 소통해야=김 지사는 젊은 시절 25년을 재야 운동권에 있었다. 그가 민주자유당으로 정치권에 입문했을 때 '변절자' 소리를 들은 이유다.

김 지사는 1986년 전두환 정권 호헌의지 철폐를 위한 5ㆍ3 인천 사태에 연루돼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때 감옥에서 세상의 변화를 알았다고 토로한다. 그는 "감옥에서 깡패, 도둑놈, 소매치기, 사기꾼, 경제ㆍ교통사범, 억울한 사람, '빽 없는 사람', 교도관을 모두 만났다"며 "이들을 만나면서 혁명사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며 한낱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는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1988년 사회주의의 붕괴를 맞았을 때 이런 확신이 더욱 커졌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치를 지지하며 부천시 소사구 조직책으로 민자당에 입당한 후 국회의원 세 번을 지내고 도지사로 두 번째 임기를 지나고 있다.

그가 남양주 소방관과 통화한 후 해당 소방관은 사실상 징계인 전보를 당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소방관이 민원 응대 원칙을 어겼다는 지적을 누를 만큼 많은 비판을 받았다.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주변의 '과잉충성' 역시 그의 책임이다.

김 지사는 곧바로 전보를 철회시키고 해당 소방관을 만나 화해했다. 그는 "하위직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소통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로서는 겸허하게 일하게 된 계기가 되는 좋은 채찍이었다" 고 반성했다. 그는 예전에 아무리 일을 잘해도 말을 잘못하면 국민은 아프다는 기자의 지적을 받고 "부인도 말조심하라고 지적한다. 고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살면서 세상의 큰 변화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민심의 변화에도 세심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현장정신' 중시… 직접적인 질책도 서슴지 않아


■ 업무 스타일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지난 2010년 6ㆍ2 지방선거 때 야당 바람을 뚫고 도지사에 재선됐다. 당시 인천은 야당이 승리했고 간신히 이긴 서울시도 지난해 10ㆍ26 재보궐 선거에서 다시 야권이 이겼으므로 그는 수도권에서 유일한 한나라당 소속 지방자치단체장이다.

그가 도지사로서 의회와 중앙정부 등과 현안을 잘 풀었다고 평가 받는 것은 무상급식이었다. 그는 친환경 무상급식 확대로 논란을 부드럽게 조율했다. 학교급식에 대해 김 지사는 원조라고 할 만하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그는 "결식아동 지원 예산을 배정하라"며 혼자 싸운 끝에 1999년 학교급식법을 개정했고 예산도 처음으로 따냈다. 지역구 사정에 훤했기 때문에 나온 배짱이었다.

지금도 그는 현장을 중시한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경기도를 훑는다. 그러다 보니 남양주 소방관 사태도 나왔다. 당시 그는 119에 직접 전화해 문제를 알아보려는 '현장정신'을 발휘했지만 장난전화라는 오해만 샀다. 2010년 경기 연천 한센인 마을의 염색공장 예산지원을 논의하는 현장회의에서도 일감이 없다는 한센인 사장에게 "예산 끊어야겠다"고 다그쳤다. 이곳 한센인의 숙원사업이던 염색공장 허가를 내준 그지만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냉정하게 쳐낸 것이다. 하지만 도지사가 직접 질타하자 당사자는 당황했다.

그가 '현장정신'을 계속 이어가려면 마지막 질책은 실무진에 넘긴 후 확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안철수ㆍ박근혜ㆍ문재인 등 다른 대선주자들이 말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다른 주자들과 달리 현장을 뛰는 행동주의자인 그의 행보 전체를 깎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치 평자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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