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루스벨트의 교훈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30년 전 ‘바람과 라이온’이라는 영화에서였다. 모로코 탕헤르에서 베르베르족이 미국인 가족을 납치하자 그는 단호한 어조로 인질 구출을 지시했다. 미군은 군사작전 끝에 인질들을 구출해냈다. 그는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묘사됐지만 그는 늘 당당했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한 나라의 대통령다운 모습이었다. 루스벨트는 다양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1901년 암살당한 후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할 때 42세였다. 그는 또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다. 러일전쟁 종전 협상을 중재한 공로 덕분이었다. 미국인들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 리스트에서 항상 3~7위권을 지키고 있을 정도다. 사우스다코타 러시모어산에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과 함께 루스벨트의 두상(頭像)이 새겨져 있는 것에서도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루스벨트는 정치인일 뿐 아니라 탐험가, 군인, 자연보호 운동가로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스페인과 전쟁이 터지자 의용군을 조직해 참전하는가 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마자 훌쩍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또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출간한 저서만 35권에 이른다. 웬만한 전업 작가도 따라가기 어려운 분량이다. 아무래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분야는 정치다. 그는 오늘날의 미국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표준 재무제표 작성 의무화, 철도회사에 대한 회계 감독 강화 등을 통해 경제 독점을 깨트리는 데 주력했다. 적극적인 자연보호활동도 치적으로 꼽힌다. 플로리다에 미국 최초의 ‘국립 조류(鳥類) 보호구역’을 지정했다. 그의 공적을 기려 ‘시어도어 루즈벨트 국립공원’이 만들어졌다. 파나마운하 건설도 그의 공로다. 파나마운하 덕택에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간의 해상 운송거리는 1만3,000㎞나 단축됐다. 루스벨트에게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04년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4년 후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대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후계자로 키웠다. 하지만 태프트는 루스벨트를 배신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루스벨트의 색깔을 지우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인맥을 정리하는 동시에 정책 기조도 크게 수정했다. 루스벨트는 참을 수 없었다. 공화당 내의 추종자들을 규합, ‘진보당’을 만든 후 1912년 대통령선거에 뛰어들었다. 물론 태프트도 출마했다. 민주당 후보는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었다. 선거 결과는 뻔했다. 루스벨트와 태프트가 각각 27%, 23%를 얻은 반면 윌슨은 42%의 지지를 얻어 백악관에 입성했다. 루스벨트는 그 후 “유약하기 짝이 없다”며 윌슨을 씹는(?) 재미로 살아야 했다. 루스벨트의 패착은 권력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됐다. 권세욕 때문에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분간할 수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일까. 1916년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던가. 100년이 흐른 뒤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또 다시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출마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가슴에 와닿는 것은 없었다. 그저 짜증만 날 뿐 이었다. 신의와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시대 흐름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렀다. 시대의 흐름도 바뀌었다. 선동열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다시 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다. 그것이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다 이제는 벤치가 그에게 더 어울리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후배들을 성원하는 게 맞다. 보지 말아야 할 모습을 목도(目睹)하는 바람에 입맛이 개운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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