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6월 11일] 대기업의 '말로만 상생'

"민감한 시기라서…." 최근 기관들을 상대로 기업설명회(IR)를 개최했던 A 코스닥 업체의 홍보 담당자는 행사에 참가한 기자에게 "IR 내용은 비보도로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기업의 영업 비밀을 기관들에 알린 IR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해 이유를 물으니 "최근 제품을 납품하고 있는 B 대기업과 단가 협상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B 대기업에서 납품 단가를 낮추기 위해 최근 1년간 A 업체에 대한 기사를 스크랩해놓고 "기사를 보니 실적 좋던데 단가 좀 낮추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압박을 넣는다는 것이다. 코스닥의 정보기술(IT) 장비업체 C사의 한 관계자는 근황을 묻는 질문에 "요즘 힘들다"고 토로했다. 납품하는 대기업의 구매 담당자와 단가 문제로 오후11시가 넘도록 전화로 다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 입장에서는 단가를 낮추는 게 자신의 실적으로 연결되니까 납품 가격을 낮추려는 시도가 이해는 가지만 무리한 요구를 할 때는 너무 답답하다"며 "수출 대기업들이 지난 1ㆍ4분기에 사상 최대 규모의 실적을 올렸다고 하지만 그 바탕에는 중소기업의 희생이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최근 코스닥 업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년 정부와 산업계에서 주장하는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는 올해에도 구호에 불과할 것 같다. 기업 경쟁력의 가장 기본인 '수익성'을 보장하는 환경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ㆍ독일의 우량 중소기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말은 공허한 외침과 다름없다. 또 다른 코스닥 업체의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뒤에서는 중소기업을 옥죄고 앞에서는 최대 실적을 거뒀다며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 갑자기 울컥할 때가 있다"며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말하는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ㆍ금 술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사람의 피)'이라는 말이 조선시대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물론 일부 대기업들은 최근 '상생'을 강조하며 중소기업과의 동반 성장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업계의 뿌리 깊은 관행을 고려해볼 때 이 같은 변화가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기가 쉽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건 기자만의 생각일까. "대기업들이 상생을 외치지만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한 코스닥 업체 대표의 걱정이 '기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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