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외판으로 취급하는 책은 다양한 어린이용 전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주택가 중심으로 돌아다녔고 주부를 상대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큰 고민거리는 낯선 집을 방문할 때마다 처음 무슨 말을 먼저 꺼내 좋은 인상을 주느냐는 것이었다.
외판이라는 직종의 특성상 처음 말을 걸었을 때 상대방이 거부감을 느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만큼 외판사원의 첫 인상은 중요하다. 어느 날 보문동 주택가를 다니다 몹시 목이 말라 대문이 반쯤 열린 집으로 들어갔더니 서너 살 된 아이와 아주머니가 뜰에 앉아 있었다.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좀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세요.” 아주머니는 마당 가운데 있는 수도를 가리켰다. 나는 바가지로 수돗물을 받아 갈증을 풀었다. 그 때 어디선가 심한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부엌 석유 풍로에서 나는 냄새였다.
“석유 냄새가 많이 나네요. 풍로가 고장 났나요?” 나는 풍로를 보며 말했다.
“예. 무슨 문제가 있는지 불꽃은 약하고 냄새는 심하네요.”
“석유 풍로를 좀 아는데 한번 봐드리지요. 냄비 내려놔도 됩니까?”
“그러세요.”
뜨겁게 달아오른 냄비를 내려놓고 풍로를 살펴봤다. 원통형 심지를 보니 그을음이 두껍게 붙어 있었다. 심지를 뽑아 그을음을 긁어 내고 둘쭉날쭉한 모양을 고르게 다듬은 후 불을 켜니 그을음은 물론 냄새도 나지 않고 보기 좋게 불꽃이 타올랐다.
“심지에 그을음 딱지가 많이 앉았네요.”
“고맙습니다. 솜씨가 참 좋으신데 뭐 하시는 분이세요?”
“좋은 일 합니다. 이런 거 보신 적 있으세요?”
그제서야 나는 팜플렛과 견본용 그림책을 보여 주며 어릴 때 읽은 책이 성격 형성에는 물론, 일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다면서 책의 가치와 중요성을 성의껏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월부로 책 한 질을 계약했다. 그러는 동안 옆 방에 사는 아주머니가 왔고 이웃집의 또 다른 아주머니도 왔다. 옆 방 아주머니는 형광등을 좀 달아달라고 했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자기네 풍로도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손봐 줄 것을 부탁했다. 나의 `노력봉사` 덕분에 그림책 한 질을 또 계약했다.
그 날은 무려 책을 네 질이나 계약했는데 그것은 외판을 시작한 후 하루에 올린 최고의 실적이었다. 그 후 책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 도움을 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고객과 친분이 생기고 책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었다. 계약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손주를 둔 노인, 조카를 둔 젊은 여성 등 고객층도 차츰 다양해졌다.
한번 책을 판매하고 난 후 주변을 지날 때면 다시 들러 안부를 묻고 아이들과 놀아 주거나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여인숙집 아이들에게 했듯이 숙제를 했느냐고 물어 시큰둥하게 대답하거나 안 했다고 하면 바로 돌봐 주는 일이 잦았다.
어떨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를 돌봐주다 해가 저물 때도 있었다. 그 사이 아이들 엄마들은 과일이나 과자 등 간식을 주기도 했고,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며 밥상을 차려 주기도 했다. 조금씩 친분이 쌓이자 아이들을 위한 다른 책이나 어른들이 읽을 책도 구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무슨 책이든 다 구할 수 있다고 했고 실제 부탁 받은 책은 다 구해 주었다.
어떤 일을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서 실적은 하루하루 좋아졌고 수당도 많아졌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