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성공한 대통령, 국민이 만든다


얼마 전 강릉시 안인진 인근 염전해변을 걸은 적이 있다. 모래가 잔뜩 묻은 샌들과 맨발을 닦으러 공공 화장실에 들어가자 발을 씻지 말라는 경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세면대 물을 손으로 받아 모래를 씻을 요량으로 수도꼭지를 돌렸더니 그대로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모래가 하도 막혀 배관을 아예 빼버린 탓이다. 21세기가 됐는데도 신발용 수도꼭지를 만드는 건 고사하고 그저 세면대에서는 발 씻지 말라는 1970,1980년대식 '하지마'다.

공공 화장실에서 북쪽으로 10여분 걸어 올라가면 아담한 유럽풍의 골프텔이 하나 있다. 입구 옆에는 큼지막한 신발 전용 세척대가 해변 산책객들을 반긴다. 금지만 하는 낡디낡은 규제의 공공 부문과 고객의 니즈(needs)에 똑맞는 서비스를 하는 민간 부문이 나란히 공존하는 모양새다.

낙후된 공공과 앞서가는 민간. 이 얼개는 대충 대한민국 어디에 들이대도 잘 들어 맞는다. 어느 정권이나 규제완화 얘기를 단골로 하는 걸 보면 공공 부문 규제의 심각성은 잘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임에 틀림없다. 박근혜 대통령만 해도 지난달 11일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모든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했다.

과연 '선진 민간'신화는 불패인가. 의료ㆍ교육ㆍ법률 등 서비스산업으로 눈을 돌려보면 상황은 역전된다. 이 분야에선 '공공=규제, 민간=창의'라는 공식이 철저히 깨진다. 오히려 정부는 이 섹터의 민간 이해관계자들에 비해 매우 진보적이며 시장친화적이다. 반면 19세기 구한말 쇄국정책을 방불케 하는 규제탑 쌓기의 주범은 철저하게 '민간'이다.

인천 송도대교 오른쪽 국제업무단지에는 잡풀만 무성한 들판이 어색하게 버티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이 세우기로 한 영리병원인 송도국제병원 자리다. 2009년 미국 존스홉킨스병원과 서울대병원이 국제병원을 만들어 의사ㆍ간호사 4,000명을 포함해 1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한 약속의 땅이다. 4년이 지났지만 이 곳에선 콩과 보리가 자란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89년 정부는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등 경쟁국들이 원격진료 법을 만들어 착실히 신산업을 성장시켜온 반면 한국에선 의사대 환자 원격진료는 여전히 불법이다. 의사협회 등의 반대로 국회에서 관련법 통과가 번번히 무산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영리병원과 U헬스케어라는 창조경제 영역을 개척하려 할 때마다 딴지를 걸고 무산시킨 건 이렇듯 민간이다. 밥그릇을 지키려는 의사집단, 얼치기 평등주의를 내세우며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민단체, 그리고 이들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국민이야말로 규제의 장본인인 것이다.

물론 표만 세는 데 혈안이 돼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폐기시키고 있는 정치인들이 가장 걸림돌이다. 국회의원들은 '영리병원은 돈 있는 사람만 골라 치료하며 국민 건강보험을 파탄내고 병원비를 폭등시킨다'는 잘못된 선동을 바로 잡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

이뿐인가. 국제도시를 표방하는 서울특별시에 외국에서 앞다퉈 유학오는 변변한 국제학교가 없다. 평등주의 공교육이 마치 진리인양 화석화된 집단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이 교육 후진국을 자초하고 있다.

법률시장 역시 사법시험 출신자들의 신분제 성역을 보장해주다 보니 글로벌시장 진출은커녕 안방까지 내줄 판이 됐다. 법률시장 개방 등 사법개혁은 지난 1993년 집권한 김영삼 정부의 중점 과제 중 하나였던 걸 반추해보면 민간의 저항은 이렇듯 집요하고 강고하다.

박 대통령은 제조업 산업강국의 기틀을 일군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DNA를 따라 서비스 강국의 토대를 만들려 하고 있다. 백번 옳은 길이다. 서울에서 3시간30분 반경에 세계 인구의 3분의1이 살고 있는 지금 의료ㆍ교육ㆍ관광 등 서비스산업에 일자리와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 혼자서는 결코 이 과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

부전여전(父傳女傳)의 성공한 여자 대통령을 만드는 건 국민들 몫이다. 기득권을 지키려 혁신을 말살하는 민간 규제, 이를 조장하고 고착화시키는 정치권을 바로 잡는 국민적 자각과 운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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