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同病相憐)의 한·일 두 나라가 현실과 타협했다.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해서는 세계경제대전(大戰)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기 어렵다는 절박감이 두 나라를 뭉치게 만들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8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은 한·일 양국이 새로운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공동선언은 세기적 전환기를 맞아 한·일 양국의 지난 20세기 과거사를 청산하고 21세기 새로운 선린우호협력관계를 형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과거사 반성에 대해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명문화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양국간 과거사는 이제 일단락 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선언으로 양국간의 감정적 앙금, 특히 우리 국민정서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
한국 외교사상 외국과 포괄적인 협력문서로는 첫 사례인 이 공동선언은 지금까지와 같은 「가깝고도 먼 관계」로는 한·일 양국 모두 양자간 상호협력 증진이나 국제무대에서의 행동반경 확대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공통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양국은 지난 65년 한·일 기본조약 체결이후 경제, 국제외교 측면에서 서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왔으나 과거사로 인한 응어리때문에 반목을 되풀이해 왔다. 이로 인해 한국은 일본과 안보 및 문화교류에서 스스로 한계를 그었고, 일본은 국제무대에서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성숙한 국가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분위기 때문에 경제협력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金대통령이 이처럼 과거사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것은 단순히 불편한 과거의 응어리를 제거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21세기 미래지향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과거사에 얽매이기보다는 일본의 힘, 특히 경제적 실력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일본을 적극 활용한다는 실용주의적 일본 활용론이 金대통령의 대일정책 기저에 폭넓게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번 공동선언을 통해 새로운 한·일 동반자 관계의 초석을 깔았다고 하더라도 독도, 종군위안부, 일본측의 망언 가능성 등 언제든 양국관계를 긴장시키는 변수가 돌출할 소지는 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이 지정학적 근린관계에 걸맞는 선린우호 관계를 정착시키는 데는 앞으로도 양국 지도자와 국민들의 많은 노력과 인내와 성의가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번에 마련된 공동선언은 양국관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통할하는 보다 포괄적인 차원의 협력방안도 담고 있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최근의 외환위기가 증명하듯이 아시아는 동일경제권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양국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1월 중국 방문때 한·중간 특별관계 제창을 통해 한·중·일간 3각 협력체제를 구축, 아시아의 평화·안정·번영을 도모하는 구상으로 이어간다는 것이 金대통령의 복안이다.
한·일 양국은 이 선언에 따른 실천방안을 제시할 「행동계획(Action Plan)」도 마련했다.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에서 제시된 양국간 안보정책협의회, 대북정책 공조를 위한 다양한 차원의 정책협의, 양국간 경제정책협의, 환경정책대화, 고위농업협력위, 노·사·정 교류 등은 안보, 문화분야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균형된 협력체제를 갖춘다는데 의미가 있다. 또 이중과세방지협정과 일본수출입은행의 차관지원, 공대생 교류 등을 통해 경협의 기반을 넓혀나가는 성과도 예상된다.
공동선언을 뒷받침할 행동계획을 착실히 진행시키는 것이 양국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며, 특히 「용서」를 받은 일본이 보다 적극성을 발휘해야 할 것이라는 기대여서 귀추가 주목된다. 【도쿄= 김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