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4월 30일] <1684> 기독교 박해 중단


'오늘부터 기독교도의 공동체 재건을 인정한다. 단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만 그렇다.' 311년 4월30일, 로마의 갈레리우스 황제가 내린 '관용칙령(Edict of Toleration)'의 골자다. 갈레리우스는 가장 가혹한 압제를 행했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에 내려진 네 차례의 탄압령을 주도했던 인물. 그는 왜 태도를 바꿨을까. 설이 분분하다. 숙적인 페르시아와의 완충 역할을 해온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데 자극을 받았다는 해석에서 회개설과 중병설까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분명한 사실은 갈레리우스가 병상에서 관용칙령을 반포했으며 닷새 후에 사망(69세)했다는 점이다. 로마제국의 동방과 서방을 각각 정제와 부제가 분할 통치하던 4두 체제였지만 갈레리우스의 관용칙령은 서방 일부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전지역에서 통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끝났다. 관용칙령은 출발점이었다. 2년 뒤인 313년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밀라노 칙령)하고 392년에는 국교로 정해졌다. 철학자로도 이름을 남겼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편협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했던 기독교를 로마가 급속하게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이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의 해석에 따르면 두 가지 움직임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이민족과 전쟁으로 로마제국은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등 날로 쇠락해지는 반면 기독교 공동체는 규율과 단결로 '국가 속의 국가'로 성장해 양자 간 결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로마제국와 기독교의 결합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문명을 낳았다. 갈레리우스의 관용칙령은 세계질서의 첫 단추 격이지만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생전의 악행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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