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빌딩숲으로 이사 온 말없는 파수꾼

[도심의 산소탱크 가로수] 느티나무 1그루 이산화탄소 年2.5톤 흡수
방풍·방음 효과도 탁월… 은행나무 가장 많아
"도시 이미지 좌우" 지자체 조성작업 한창





"만약 나무가 없다면 이 세상에는 종말이 올 것이다" 남미 원주민인 라칸돈 인디언은 나무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파했다. 그들 말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수많은 나무들이 내뿜는 산소를 마시며 숨을 쉬고 있다. 나무는 홍수나 가뭄의 대재앙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었고 나무에 열리는 각종 과실은 오래 전부터 우리의 배를 불려줬다. 그네를 매달 수 있는 나뭇가지와 낮잠을 잘 수 있는 그늘, 집과 배를 만들 때 필요한 줄기를 모두 주고도 마지막엔 노년에 기대어 쉴 수 있는 밑동까지 내어준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인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나누어주면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삭막한 콘크리트 숲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는 가로수다. 자연의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다. 녹음이 짙어가는 4월, 도심 속 산소탱크인 가로수의 모든 것을 알아봤다. ◇도심 속 '아낌없이 주는 나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가운데 도로 위에 나무가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가로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BC 14세기경 이집트에서는 무화과나무 계통, BC 5세기경 그리스에서는 플라타너스(버즘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고 전해진다. 고대 중동지방의 경우 열매가 달리는 유실수를 가로수로 심게 해 가난한 사람이나 나그네들이 따먹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는 뤄양(洛陽)으로 가는 길가에 복숭아나무나 자두나무를 심었고 진시황 때는 소나무, 당나라 때는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가로수 역사는 아직 일천하다. 약 145년 전 조선 고종 2년(1866년) '도로 양 옆에 나무를 심으라'는 왕명에 따라 처음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각종 매연과 소음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가로수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가로수로 많이 심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는 하루 평균 잎 1㎡당 664㎉의 대기열을 제거해 하루 동안 0.6ℓ의 수분을 방출한다. 이는 하루에 15평형 에어컨 8대를 5시간 동안 가동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아스팔트 도로와 고층빌딩 숲에서 뜨거워진 도시를 시원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느티나무 한 그루는 온실가스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연간 2.5톤 흡수하는 대신 신선한 산소 1.8톤을 방출해준다. 이는 7명의 사람이 1년간 필요한 산소량이다. 또 도로 양쪽에 침엽수림대를 조성하고 중앙분리대에 키가 큰 침엽수를 심을 경우 자동차 소음의 75%, 트럭 소음의 80%까지 줄어든다. 가로수는 화재나 바람으로 인한 피해를 줄여주는 역할도 한다. 일정 규모의 가로수는 방풍 효과가 50%에 달하며 목재의 발화 한계치를 2~3배 이상 끌어올려 화재 위험을 낮춰준다. 보행자나 운전자에게 쾌적한 느낌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하며 도심 속 건축물의 삭막한 느낌을 한층 부드럽게 해주는 것도 가로수의 미덕이다. ◇세월 따라 가로수도 세대교체=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시대에 따라 가로수도 새롭게 변하고 있다. '가로수의 대명사'로 불리며 도심 속 가로수의 상징으로 군림해온 플라타너스는 최근들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지난 4일 서울시에 따르면 1980년 12월말 기준 플라타너스는 서울시 전체 가로수 가운데 가장 많은 38%를 차지했고 수양버들(27%)과 은행나무(14%)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30여년만인 지난해말 플라타너스의 비중은 29%로 떨어지면서 41%를 차지한 은행나무에 가로수의 왕좌를 내주었다. 30년 전 2위였던 수양버들은 현재 전체 가로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2%에 불과하다. 봄이면 하얗게 홀씨를 흩날리던 수양버들은 사람들의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는 점 때문에 인기가 급락, 현재 서울에선 단 516그루밖에 찾아볼 수 없다. 과거 병충해에 강하고 성장이 빠른 나무 위주로 심었던 가로수의 초기 정책이 최근 들어 미관이나 기능성이 뛰어난 나무, 고유종 중심으로 교체된 결과다. 사실 플라타너스는 세계 4대 가로수에 포함될 만큼 여전히 대표 가로수다. 병충해에 강하고 성장속도도 빠른 동시에 가지치기도 자유로와 다양한 모양으로 연출이 가능하다. 잎 면적도 넓어 대기정화 기능이 탁월하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특징이 오히려 단점으로 부각되는 추세다. 20m를 훌쩍 넘는 큰 키와 넓은 잎이 고층건물의 유리창이나 간판을 가린다는 민원이 잇달아 제기된 탓이다. 꽃이 화려하지 않은데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왔다는 '아픈' 과거도 찬밥 신세로 전락한 또 다른 이유다. 산림청이 지난 2월부터 한달동안 전국 성인남녀 1,3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로수'를 조사한 결과 지난 2006년 3위였던 플라타너스는 올해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플라타너스는 지난 2004년 9만8,065그루였으나 지난해 8만1,162그루로 불과 5년 새 1만7,000그루(20%) 가까이 줄었다. 반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 꽃이 아름다운 나무는 인기 상한가다. 4월에 피는 하얀 꽃이 마치 하얀 쌀알을 연상시킨다고 해 '쌀밥나무'로도 불리는 이팝나무는 대표 수혜주다. 국내 고유종인 이팝나무는 본래 산에서 자라는 야생나무였지만 아름다운 꽃 덕분에 가로수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004년만 해도 시내에서 한 그루도 찾기 어렵던 이팝나무는 지난해 4,742그루까지 늘었다. 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벚나무도 2004년 1만2,462그루에서 5년만인 2009년 2만527그루(60%)로 증가했다. ◇도시의 이미지를 심는다= 가로수는 대기 정화, 소음 감소 같은 본연의 기능뿐 아니라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 '모래시계'로 잘 알려진 충북 청주의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나 8.5km의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시원스럽게 뻗은 전남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지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가로수의 도시 이미지 개선 효과가 입증되면서 전국 지방자치단체들마다 가로수길 조성 작업에 뛰어들고 있다. 강원도 인제군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인제 관문인 남면 어론리~부평리의 1km 구간에 단풍나무 1,616그루를 심을 예정이며 경북 경주시는 지난 3년간 350km 구간에 25억원을 투자한 가로수 식재 사업을 올해까지 완료하기로 했다. 충청남도는 오는 2012년말 홍성ㆍ예산 지역에 들어설 도청 이전 신도시에 '명품 가로수길'을 조성한다. 이를 위해 2016년까지 주요 가로변에 총 길이 75km의 가로수길을 만들기로 하고 가로변에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이팝나무, 살구나무 등 최근 인기 있는 가로수들을 각 구역별 특성에 맞게 심을 계획이다. 지자체들의 가로수 심기 열풍 속에서 단연 눈에 띄는 나무는 소나무다. 서울 강북구는 지난해 전국 최초로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12곳에 총 90그루의 소나무 가로수를 조성한 데 이어 4ㆍ19길과 솜샘길에도 각각 87그루와 140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 강북구청 관계자는 "그동안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 일색이던 가로수를 사계절 푸른 소나무로 교체해 도시 미관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도 지난 2007년부터 추진해온 '도심 소나무 심기 운동'으로 지금까지 2,044그루의 소나무를 조성했으며 관내 총 7,650그루의 가로수 가운데 30%를 소나무로 교체했다. 퇴계로와 중림길 일대에 가면 수백 그루의 소나무들이 올곧게 뻗어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중구청이 '소나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유명 백화점과 호텔, 관광지 등이 많은 중구에 소나무를 심어 '전통의 거리'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전북 고창군과 충남 부여군 등도 소나무 가로수길 조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지자체들의 소나무 가로수길 조성에 반대의 목소리도 나온다. 병충해에 매우 취약한 소나무가 가로수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1950년대 솔나방, 1960년대 솔잎혹파리와 잎떨림병에 이어 1988년 이후 유행한 재선충은 전국의 수많은 소나무들을 고사시켰다. 또 키가 지나치게 커 쓰러질 위험이 높고 생장속도가 느리다는 것도 소나무의 취약점으로 꼽힌다. 한봉호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는 "가로수를 심을 때는 무엇보다 나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며 "아무리 소나무가 지닌 의미가 좋더라도 대기오염에 가장 취약한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는 건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또 도시인들에게 녹지와 그늘을 제공하는 가로수의 기능적인 측면에서도 침엽수인 소나무는 제 기능을 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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