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들어서만 5천5백억어치 팔아/“동남아는 단일경제권… 한국과는 다르다” 분석도/증시붕괴→통화폭락 최악국면 우려24일 한국경제는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가능성의 차원을 넘어 현실로 다가오는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합주가지수는 사상 최대규모로 폭락했고 원화의 대미달러환율은 달러당 9백30원까지 치솟았다.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인 S&P사는 이날 예상했던 대로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도를 AA에서 A+로 떨어뜨렸다. 외국인들은 이달들어서만 5천5백억원 어치 이상의 주식을 팔아치우며 한국증시를 떠나고 있다.
주가가 폭락하는 일이야 시장속성상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외환시장까지 흔들리는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멕시코나 동남아식의 외환위기가 본격화할 징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의 단초는 외국인 주식투자자금 유출규모를 공개할 수 없는 당국의 곤혹스런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의 유출입동향을 매일 점검하고 있는 한국은행은 매달초 발표하던 월간동향마저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외국인 자금의 유출이 그만큼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은은 『외국인 자금유출동향이 알려지면 시장에 더 큰 불안감만 안겨줄 것』이라는 궁색한 해명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국내 외환시장의 교란요인은 그리 많지 않다. 채권시장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이 부분의 외국인 동향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최근 싱가포르에서 형성된 원화 거래시장인 「역외선물환시장」(NDF:Non Delevery Forwards Market)도 거래규모가 하루 2억∼3억달러에 불과해 아직은 국내 외환시장을 교란시킬 요인은 못된다. 문제는 국내 증시에 들어온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인 셈이다.
최근 증시와 외환시장의 동향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지난 20일 고시된 원화의 대미달러환율은 달러당 9백14원80전. 이날 9백14원선에서 안정된 모습을 보이던 환율은 대만통화 폭락소식이 전해지면 마감 20분전부터 폭등세를 타기 시작, 순식간에 9백24원까지 치솟았다. 이후 큰 폭의 등락을 거듭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환율은 23일 하오부터 홍콩의 주가폭락소식과 함께 반등, 24일엔9백30원까지 급상승했다.
주가는 21일 19.07포인트 폭락세를 보이며 순식간에 종합주가지수 6백선이 무너져 내렸고 22일 기아라는 호재를 만나 34.47포인트나 급등했지만 외국인들은 여전히 주식을 팔았다. 결국 24일엔 사상최대의 낙폭을 기록했다.
일찍이 외환시장이 증시와 이처럼 깊은 관계를 보인 적은 없었다. 외환시장은 그동안 수출기업들의 네고자금공급이나 수입업체들의 결제자금 수요에 따라 움직였고 그래서 예측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외국인투자가들은 21일 8백59억원, 22일 8백81억원, 23일 6백12억원어치를 매도했고 이달들어 23일까지 순매도금액은 5천4백21억원에 이른다. 이렇게 증시를 빠져나온 외국인들이 손바꿈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한국을 떠나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고 있다. 증시의 외국인투자가 동향이 외환시장에 바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얘기다.
한은 관계자는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를 앞둔 2∼3개월 동안은 자금 유출이 늘어난다』며 『지난 9월이후 상황이 오는 11월3일 한도확대를 앞두고 나타나는 일상적인 모습이기를 바랄 뿐』이라고 고민을 토로했다. 지금까지도 문제였지만 11월이후에도 주식자금 순유출이 계속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주가폭락에 이은 외환위기라는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에선 원화가치 폭락의 수준이 다른나라에 비해 크지 않다는 반론도 펴고 있다. 원화가치는 지난 23일 현재 전년말대비 8.1% 하락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33.7%, 태국 바트화 32.7%, 말레이시아 링기트화 24.5%, 필리핀 페소화 22.1% 폭락에 비해선 상황이 낫다는 얘기다.
또 통화폭락과 증시붕괴를 맞이한 동남아 각국이 사실상의 단일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일각에선 여전히 『한국은 동남아국가와 다르다』는 화두를 끌어안고 있다.
물론 한국에도 동남아 통화위기의 여파가 밀려들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외환당국 관계자들의 표정에서 『이번에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짙게 배어나온다.<손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