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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북쪽으로 1시간30분을 자동차로 달리면 웨이난시 푸핑현에 도착한다. 부유한 평야라는 동네 이름답게 황토산에 둘러싸인 평야에는 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후난성 창사시의 쥐쯔저우 공원이 마오쩌둥의 고향을 찾는 좌파의 성지라면 시진핑 국가주석의 고향이자 아버지 시중쉰의 묘소가 자리 잡은 푸핑은 현재 중국의 권력과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곳이다.
푸핑현 타오이촌 시중쉰의 묘소는 쥐쯔저우 공원과 달리 요란하거나 시끄럽지 않다. 유치원 아이들이 소풍 와서 뛰어 놀고 세 살 난 딸의 손을 잡고 기념관을 찾은 중국인의 모습이 평온하다. 신분증을 검사한다고 하지만 까다롭지도 않다. 오히려 묘소 앞에는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다. 그렇다고 묘소가 초라하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2005년 베이징에서 이장한 후 새로 단장된 묘소 뒤에는 나무를 빼곡히 심어 산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시중쉰의 좌상 뒤로 숲이 우거진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다.
부패척결을 내세우며 권력을 강화하는 시 주석이 아버지 묘소에 이렇게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시중쉰 탄생 100주년이었던 10월15일을 즈음해 시작된 시중쉰 띄우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인민대회당에서 열렸고 중국 관영 CCTV는 일주일간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오는 12월26일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을 겨냥한 시중쉰 띄우기라는 분석마저 나오고 있다.
국가 최고지도자급인 주석이나 총서기ㆍ총리에 오르지도 못하고 공산당 혁명 8대원로에도 뒤늦게 합류한 시중쉰에 대한 추모 열기는 살아 있는 권력의 힘도 작용했지만 개혁개방에 힘을 싣기 위한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 실제 최근 중국 매체들은 공산당 혁명 8대원로보다 '공산당개혁8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1세기경제보는 덩샤오핑을 필두로 덩샤오핑 복권에 힘을 실은 예전잉 전 국방부장, 마오쩌둥의 오류를 비판한 후야오방 전 총서기, 시중쉰 부총리, 완이 부총리, 런중이 전 광둥성 서기, 경제전문가인 구무 부총리, 농업개혁의 선구자인 항난 전 정치위원을 개혁 8현으로 집중 부각시켰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의 아버지인 보이보 전 부총리나 중신그룹 회장을 지낸 왕쥔의 아버지인 왕전 전 부주석, 양상쿤 주석 등 기존 8대혁명원로 중 덩샤오핑과 시중쉰을 제외하고는 8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중국 매체들이 8대혁명원로에서 개혁8현으로 초점을 옮긴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중국 공상당 지도부가 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를 불과 5일 앞두고도 아직 보수와 개혁 좌우세력들의 의견조율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내비친 것으로 분석했다. 좌우파의 물밑 세력다툼이 치열해지며 퇴임한 개혁파 원로들도 시진핑 체제의 개혁에 힘을 싣고 있다. 정치제제 개혁을 주장하다 실패한 원자바오 전 총리는 시중쉰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데 이어 "과학과 민주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제개혁을 이끈 주룽지 전 총리도 지난달 23일 칭화대 경제관리학원 고문위원회를 접견하며 개혁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이 자리에는 저우샤오촨 인민은행 총재, 러우지웨이 재정부장을 비롯해 383개혁안을 작성한 류허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 부주임 등 개혁파 경제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개혁에 대해 시 주석도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2일 '21세기위원회' 대표와 만난 시 주석은 "중국이 개혁개방의 대문을 닫는 일은 불가능하다"며 "3중전회에서 종합적인 개혁방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혁개방의 상징처럼 시중쉰을 추모하지만 성역화하거나 마오쩌둥과 단절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시준쉰의 묘소에는 '당의 이익이 최우선이다'라는 마오저뚱의 글을 새겨놓았고 창사의 샤오산과 달리 시중쉰의 생가는 성역화하지 않았다.
타오이촌에서 다시 차로 20분가량 이동해 단춘시앙을 지나다 보면 중쉰학교가 나온다. 시중쉰의 부인 치신이 표지석 글을 쓴 이 학교는 중국 농촌답지 않게 4차선으로 잘 만들어진 도로 옆에 대규모로 증축해 산시성 내 명문소학교로 재탄생했다. 좁은 길을 물어물어 찾은 시지아장. 시씨 집성촌인 이곳은 18가구 중 8가구가 시씨집안이다. 안내판이 없는 것은 시 주석이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가에 거주하는 시 주석의 당숙모가 설명했다. 황토집 옆에 다시 집을 지은 시중쉰의 생가 대문에는 '후덕재물(厚德載物ㆍ덕을 두텁게 해 만물을 포용한다)'이라고 쓰인 현판만 걸려 있어 생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