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처방 필요한 자본시장 <2>퇴직연금 유입 물꼬 터라
상품제공 의무화 서둘러야
가입자는 고금리 증권사는 역마진 함정 벗어날 수 있어
기금형 도입도 시급
국내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국민연금과 같은 대규모 장기투자기관이 필요하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이런 역할을 퇴직연금이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하지만 퇴직연금은 은행 등에서 내놓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90% 이상 투자되고 있다. 퇴직연금이 연 3% 중반의 예금 상품에 대다수 투자하면서 가입자와 사업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가입자는 수령시점에 예상보다 적은 연금을 받아 소득대체율이 줄어들 가능성이 커졌고,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유치경쟁을 위해 손해를 무릅쓰고 고금리를 제시하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정부가 상품제공 의무화와 기금형 제도 도입 등으로 자본시장 활성화와 퇴직연금시장 건전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현대증권·KDB대우증권 등은 확정급여(DB)형에 대해 퇴직연금 사업자 가운데 최고 수준인 3.8%의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국채금리와 기준금리 등을 감안하면 손해 보는 장사인 셈이다. 하지만 퇴직연금 사업자 간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고금리 제시경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현재 퇴직연금사업자는 증권사 16개, 은행 16개, 보험사 21개 등 모두 54개사로 시장에서 적절하다고 평가하는 수준(20개 안팎)의 2배가 넘는다.
최홍범 HMC투자증권 퇴직연금팀장은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왜곡된 금리경쟁에 나서면서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고금리의 함정’에 빠졌다”며 “은행 금리보다 높긴 해도 연 3% 중반의 원금보장형 상품에 100% 투자하면 퇴직연금 수령시점에 물가상승률도 따라잡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왜곡된 금리를 정상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업체는 역마진 구조를 벗어날 수 있고, 근로자들은 주식형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에 대한 투자를 늘려 현재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해결책이 바로 ‘상품제공 의무화’다. 상품제공 의무화는 한 사업자가 상품을 요청하면 다른 사업자가 이를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가령 한 금융업체가 역마진에도 불구하고 4%의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내놓았다고 치자. 다른 금융업체들은 이 업체에 동일한 상품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한 뒤 자사 고객들에게 그대로 되팔면 된다. 결국 처음 고금리를 제시한 업체는 고객 유인효과가 없고, 다른 업체들에 상품을 제공해야 돼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것이다.
박상규 한국투자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연구위원은 “상품제공 의무화가 시행되면 퇴직연금 시장의 왜곡된 금리가 빠른 속도로 정상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기금형 제도의 도입도 시급하다. 우리나라는 퇴직연금과 관련 기업체가 퇴직연금사업자에게 모든 업무를 위탁하는 계약형만 가능하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들은 계약형뿐 아니라 기금형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기금형은 기업체가 별도로 퇴직연금기금을 설치하고 회사측과 노조대표, 전문가들이 참여한 연금위원회가 기금운용을 금융업체에 위탁하는 방식이다. 기금운용과 관련 의사결정을 연금위원회가 전담하고 있어 합리적인 투자 판단이 가능하다. 이승준 우리투자증권 연금지원팀장은 “소규모 회사에서는 퇴직연금 관련 업무를 직원 한 명이 담당하는데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했다가 손실이 발생하면 혼자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위험성이 있다”며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면 퇴직연금 투자관련 의사결정이 연금위원회라는 조직으로 이관돼 합리적인 운용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해 기금형 도입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ㆍ고용노동부 등 관련부처에서 논의가 진전되지 않아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퇴직연금 제도가 잘 정착된 호주의 경우에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며 기금형 위주로 퇴직연금시장이 형성됐다. 호주는 지난 1992년 퇴직연금제도를 전면 의무화하면서 현재 퇴직연금 자산규모가 1조7,500만 호주달러(1,694조원)에 달한다. 지난 2005년부터는 근로자들에게 기금 선택권을 부여하며 퇴직연금 시장도 한 단계 발전했다. 기금 간의 수익률 경쟁이 발생하면서 연금 수익률도 높아졌다.
성인모 금융투자협회 연금지원실장은 “기금형 제도를 도입하면서 퇴직연금 시장이 한 단계 성숙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연금자산이 자본시장으로 유입돼 국내 증시 활성화 등 선순환 효과가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