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공적자금 투입을 기정사실화한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 발언이 전해지면서 정부는 다소 당혹스러워 하는 분위기다. 기획재정부ㆍ금융위원회ㆍ한국은행 등은 청와대(BH) 발언이 당장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하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가 당황해 하는 이유는 은행 자본확충 등 공적자금 투입을 위한 컨틴전시 플랜은 마련해놓은 상태지만 부처 간 세부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관련 대책은 지속적으로 검토해왔다. 하지만 이를 놓고 구체적으로 부처 간에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 이면에는 조기 공적자금 투입이 자칫 득보다 실을 더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우선 조기에 공적자금을 투입할 경우 은행 재무건전성이 개선되고, 이에 따라 중소기업 대출이 개선되는 등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사전 부실 차단으로 은행의 대외신인도도 제고할 수 있는 등 긍정적 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즉 은행의 상태가 조속히 개선되면 실물 부문에 돈이 공급되면서 유동성 어려움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경제 현장에서 떠돌고 있는 일부 은행의 부실화 우려도 사전에 차단, 시장 안정에 도움을 줄 여지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독으로 작용할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공적자금 투입의 기정사실화는 해외에서 볼 때 ‘한국의 은행이 정말 위험하구나’라는 시각을 전해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은행의 대외신인도가 추락하고 결국 국가신용등급 하락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또 현재 우리 은행들의 경우 외국인 주주가 사실상 지배하고 있다. 소액주주군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가치 하락을 우려하면서 은행주를 투매할 여지도 적지 않다. 돈맥경화 현상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LG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은행들이 공적자금 투입을 기다리며 오히려 대출을 기피하면서 일시적으로 돈맥경화가 더 심화될 여지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은행 부실이 본격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적자금이 투입될 경우 부실정도에 따라 혜택을 입은 금융기관과 그렇지 않은 금융기관이 나눠지면서 이에 따른 부작용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울러 조기 공적자금 투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향후 더 많은 제2, 제3의 공적자금이 사용될 수밖에 없어 국가 부채를 더욱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관계부처의 한 실무 책임자는 “외환위기 때와 다른 점은 우리 은행들이 외국인 주주 비율이 매우 높고, 아울러 국가의 재정건전성도 당시보다 더 나쁘다는 점”이라면서 “지난 1997년과 달리 현 시점에서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려면 수많은 함수가 포함된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게 현실”이라며 과거와 달리 고려할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은 “기업과 은행의 부실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따라 필요한 공적자금이 얼마인지를 잘 검토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며 “만약에 필요하다면 사전에 철저한 분석을 거치고, 그 규모는 아주 충분할 만큼 준비해 시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