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무리한 제재 남발… 기업은 멍든다

대통령은 "불필요한 규제 과감히 걷어내겠다"지만
질서 잡겠다며 일벌백계 처분… 행정소송 4건 중 1건서 패소
기업 "비용만 낭비" 볼멘소리
작은 비리에도 대규모 입찰 제한… 사안따라 처벌수위 조정을

이포 보(洑) 건설 현장에서 포크레인이 준설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4대강 건설 공사에 참여한 건설사들에 대한 정부의 입찰제한 조치가 법원의 효력정지 결정으로 유예되면서 정부의 과도한규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서울경제DB

행정소송은 고도 법리싸움… 대형로펌 찾아야 승소 유리
큰돈 쓴 대기업만 빠져나가


"정부는 여러분께서 더욱 힘을 내실 수 있도록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8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13 기업가정신 주간' 기념식에서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대독한 축하 메시지를 통해 "규제를 걷어 투자가 살아나고 일자리가 늘어나는 경제생태계를 만들어가겠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박 대통령의 약속에 공감할지는 의문이다. 정부가 시장질서를 바로잡겠다며 기업들의 작은 비리에도 대규모 입찰제한 등 강력한 행정제재를 남발하는 사례는 최근 들어 더 늘어나는 추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의 불공정거래를 빌미로 부과하는 과징금은 해마다 급증해 지난해에는 사상 최대치인 9,126억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건설사 수십곳이 4대강 담합을 이유로 정부로부터 1,0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 받은 것을 비롯해 관계자들의 형사기소, 6~12개월 입찰제한이라는 3중 처벌을 받았다.

게다가 사건의 전후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일벌백계(一罰百戒)'식 처분은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기업들이 정부 처분에 수긍하지 못해 법정까지 사건을 끌고 가는 사례가 적지 않은데다 소송 4건 중 1건꼴로 법원이 기업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서울행정법원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9월까지 선고된 부정당업자 입찰제한 처분 취소소송 39건 가운데 10건이 해당 기업의 승소로 결론이 났다. 1심인 행정법원에서는 기업이 패소했지만 항소심에서 뒤집힌 경우를 포함하면 모두 11건이 기업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4건 가운데 1건꼴로 정부나 공공기관의 처분이 잘못됐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온 셈이다.

법원은 정부나 공공기관이 해당 법을 남용한다고 여길 때 기업의 손을 들어준다. 처분을 내리는 행정기관이 국가계약법이나 공공기관운영법 등의 법률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소명기회를 주지 않는 등 위법한 절차를 거쳐 처분을 내렸을 때나 기업의 불법행위 수준에 비해 벌이 과도하다고 본 경우 등이 포함된다.

특히 법원은 최근 정부의 과잉규제, 즉 공권력 남용을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용인시청 공무원 전모씨는 1,100억원 규모의 도로 공사를 진행하는 K건설 직원 2명으로부터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각각 2~3회에 걸쳐 100만원씩의 뇌물을 받아 2012년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K건설 직원 2명 역시 뇌물공여죄로 함께 수사를 받았지만 전씨가 먼저 돈을 요구했다는 사정이 있는 데다 소액인 점이 참작돼 기소유예 결정을 받았다. 그러나 K건설은 직원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감독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조달청에서 발주하는 모든 공사에 두 달간 입찰이 금지되는 행정 처분을 받았다. K건설은 직원의 개인 비리에 비해 지나친 처분이라며 소송을 냈고 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이승한 부장판사)는 지난 9월 "제재적 행정처분은 해당 처분을 통해 달성하려는 공익적 목적이 이로 인한 개인ㆍ법인의 불이익에 비해 클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며 "뇌물공여 사실은 인정되지만 회사가 비리 직원들을 징계하는 등 일정 관리를 한 점, 해당 범죄가 공사의 적정한 이행을 해치지도 않은 점 등을 볼 때 이 처분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국가기관도 아닌 준정부기관이나 공기업이 행정 제재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엄중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공기업 등은 공익성을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민간기업들과 비슷한 기업성도 띄고 있는데다 이들 공기업 등이 다른 기업에 대한 제재적 처분을 남발할 경우 시장의 경쟁 원칙 등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례로 대형건설사인 D사는 중소업체인 C사와 함께 한국전력공사가 발주한 송전선로 공사를 수행했지만 추후 진행된 감사를 통해 D사가 돈을 받고 이름만 빌려 준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한전은 이 같은 가짜 컨소시엄 구성이 공사비용만 증가시키는 부당행위라며 2012년 D건설에 1개월의 입찰참가자격 제한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윤인성 부장판사)는"D사가 구성한 컨소시엄이 가짜라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며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공기업이나 준정부기관이 부정당업자를 제재할 때는 업체의 행위가 계약의 적정한 행위를 해칠 것이 명백한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하지만 이 사건 행위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며"공기업 등이 국가기관처럼 업체의 부당행위가 계약 이행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염려'만으로 제재적 처분을 내리는 것은 그 자체로 위법하다"고 못 박았다.

정부의 규제가 법정에서 구제받는 경우가 많다 보니 관련 업계는 '정부가 지키지도 못할 과잉규제를 단행해 업계에 변호사 선임비 등의 불필요한 비용만 가중시키고 있다'는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한 중견 건설사 관계자는 "행정기관의 눈에 띄는 위법 행위 등이 있어 법정에 가면 이길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법정까지 가지 않는 한 제재를 철회하는 일이 없다"며 "우리 같이 정부 수주에 목메는 중견업체는 수개월의 입찰제한 등의 제재 만으로도 회사의 존폐가 갈릴 수도 있기에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소송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기계적이고 일률적인 제재가 공정한 시장질서 회복에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비슷한 제재를 받아도 담당 변호사의 입증 능력에 따라 빠져나가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들이 엇갈릴 수 있어서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이런 행정 소송은 고도의 법리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형 로펌의 전문 분야"라며 "큰돈을 들여 대형 로펌의 변호사 여럿을 선임한 대기업일수록 판결을 통해 빠져나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에 업계는 정부의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국가 등 발주처가 담합이나 뇌물공여, 불법하도급 등의 부당행위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때 내리는 조치여야 하는데 현재 정부는 비리에 조금만 관여해도 일벌백계 식의 제재를 남발한다"며 "사안의 경중에 따라 처벌 수위도 달라져야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론도 적지 않다. 시장에 만연한 부정ㆍ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선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다. 정부부처의 고위급 관계자는 "잠깐 제재를 받아도 재판을 통해 빠져나가면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니 담합ㆍ뇌물공여 등의 비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며"작은 부정도 큰 불이익이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업계 전반에 형성돼야 부정을 근절시킬 수 있는데 법원이 '법률 해석'에만 골몰해 비리에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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