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스펀 '깜짝쇼'에 월가 '폭등쇼'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최대 강점은 시장 장악력이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이 월가 금융기관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명재무장관이었다면 그린스펀 의장은 월가 투자자 전체의 지지를 받으며 13년째 월가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월가의 황제다.
3일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리인하는 그린스펀의 장기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사실 월가에서는 지난해 12월19일의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를 내릴 가능성을 점쳤으며 이후 오는 31일로 예정된 정례 FOMC이전에 임시회의에서 금리인하가 단행될 수 있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다.
관련기사
하지만 FRB는 꿈쩍도 하지않았고, 작년말부터 조기 금리인하설이 잠잠해졌다. 2일 뉴욕 증시가 폭락세로 21세기 첫 거래를 시작한 것도 이 같은 상황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린스펀은 또한번 월가의 의표를 정확히 찌르면서 3일 금리인하를 단행한 것이다. 월가의 내로라는 FRB 관측통들도 이날의 전격적인 금리인하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뉴욕 증시가 이날오후 1시(현지시간)무렵 금리인하 직전까지 보합수준에서 오락가락했던 것은 월가에서도 금리인하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웨덜리증권의 수석투자전략가 배리 하이먼은 "증시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FRB의 의도가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날 전격적인 금리인하의 직접적인 계기는 2일 발표됐던 전국구매관리자(NAPM)지수로 보인다. 제조업의 공장생산동향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NAPM지수가 11월의 47.7에서 12월에 43.7로 급락, 91년 4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이다.
전문가들이 예측했던 47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었다. 이대로 가면 미국 경제성장률이 1%대로 주저앉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이로 인해 2일 뉴욕 증시가 폭락한 게 하루 빨리 월가의 분위기를 바꿔놓아야겠다는 그린스펀의 결심을 재촉했다는 분석이다.
그린스펀 의장이 금리인하를 얼마나 서둘렀는가는 5일 발표될 12월중 실업률 통계조차 기다리지 않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린스펀 의장이 가장 중시하는 지표가 물가지수와 실업률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불과 이틀만 참으면 노동시장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알아본 후 침착하게 금리인하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이를 무시한 채 전격적으로 금리인하를 단행한 것이다.
금리인하 폭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껏 1ㆍ4분기중에 0.5%포인트정도 금리가 낮춰질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오는 31일에 우선 0.25%포인트의 금리인하가 이뤄질 것으로 봤다. 그런데 임시회의에서 단숨에 0.5%포인트를 깎아버린 것이다.
경기침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흐름을 바꿔놓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그린스펀의 철학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린스펀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추가 금리인상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이날 발표한 성명서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점차 취약해지고 있다"고 밝혀 조만간 금리를 더 내릴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하이프리퀀시 이코노믹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이언 셰퍼드슨은 31일 FOMC에서 추가 금리인하가 단행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월가는 그린스펀의 새해 벽두 깜짝쇼를 대환영했다. 나스닥지수는 사상 최대규모인 14.17% 폭등했고, 다우지수도 300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이날 반도체 주가를 보면 뉴욕 증시가 그린스펀 효과에 얼마나 감격했는지를 알 수 있다.
모건스탠리 딘위터, 리먼 브러더스, 메릴 린치 등이 인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알테라, 자이링스 등 많은 반도체회사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내놓았지만 금리인하 발표 후 이들의 주가는 폭등세로 돌변,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가 17.5%나 폭등했다. 그린스펀의 깜짝쇼에 월가 투자자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주식 매수에 나선 것이다.
이날 거래량 역시 뉴욕 증권거래소 18억6,000만주, 나스닥시장 31억주로 사상 최대규모를 기록, 월가 투자자들이 그린스펀 효과에 얼마나 도취되었는지를 잘 보여줬다.
하지만 이번 금리인하로 미국 경제가 연착륙에 성공하고, 뉴욕 증시가 본격적인 회복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린스펀이 그 동안 밟고 있던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데 불과할 뿐이며, 앞으로 얼마나 적절한 압력으로 가속페달을 밟느냐에 따라 미국 경제와 뉴욕 증시의 장래가 결정되는 변곡점에 도착한 것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뉴욕=이세정특파원 bob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