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재벌개혁 노선 선택에 이상있다

池萬元(사회발전 시스템연구소장)한국의 재벌 회장은 유령이다. 법적 실체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고 지분율도 낮으면서 50~60개의 회사를 거느리며 황제처럼 군림한다. 정경유착에 의해 은 행돈을 마음껏 끌어다 겁없이 뿌려대다가 결국은 그 돈을 국민이 갚도록 만들고 있는 이상한 배포를 가진 사람들이다. 투자에 과학적 분석은 아예 없다. 이런 재벌들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게 국내외적 시각이다. 반면 이들 재벌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고도 투명성을 감시할줄 모르는 은행 과 정부는 더욱 더 방치할 수 없다. IMF이후 한국 대부분의 은행은 정부가 소 유하게 됐다. 관치금융이 더욱 더 판을 칠 것이고 이에 따라 부실이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은행의 부실한 경영능력이 유발시킬 천문학적 부실채권과 적자규모가 유발시킬 문제들은 경제 규모 및 메카니즘상 재벌 페해보다 더욱 심각할 것이다. 문서잡고 돈빌려주는 전당포 노릇만 해오던 은행들은 대우의 경영능력을 평 가할 줄도 모르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많은 돈을 빌려줬다. 빌려주고도 그 돈의 용처를 감시하지도 않았다. 대우는 빚을 갚기는 커녕 더욱 크게 키웠다. 빚덩이가 커지자 정부는 겁이 나서 빌려준 돈을 갑자기 회수하려 하고 있다. 하는 일을 보면 재벌이나 정부나 도토리 키재기다. 대우의 해체가 정부와 대우 간의 감정싸움의 결과냐 아니면 논리적 분석의 결과냐를 놓고 저울질 한다면 필자는 감정싸움의 결과에 무게를 얹는다. 첫째, 정부는 지금 본래의 목표인 재벌시스템을 개혁하고 있는 게 아니라 특정 재벌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정부가 성공한 재벌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주고 있는 반면 실패한 재벌에 대해서만 총수가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시스템을 개혁대상으로 했다면 모든 재벌이 개혁 대상이 돼야 하고 대우의 경우에도 정부가 지금처럼 칼을 휘둘러서는 안된다. 정부는 시스템만 만들고 시스템이 힘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그룹의 모든 기업들을 살리면서 재벌 시스템만 개혁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들을 공중분해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정부는 후자를 택하고 있다. 미국의 은행들은 한국의 은행들 처럼 기업에게 돈을 함부로 빌려주지도 않지만 돈을 빌려간 기업이 망할 단계에 오면 그 기업을 살릴 수 있는 유능한 경영진을 찾아나선다. 대우그룹내에 있는 60여개의 기업들을 살려낼 수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 다. 재벌 회장이 선정한 경영진들은 심복들로 구성돼 있어서 기업들을 살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다수의 남남으로 구성된 주주들은 정말로 기업을 살릴 수 있는 능력자를 찾아낼 것이다. 대우가 공중분해하면 4,00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대우의 주력기업들이 위치한 인천지역의 경제가 치명타를 입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와 은행은 기업 하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유능한 경영자를 찾아내려 하지는 않고 마치 감정 자랑이라도 하듯 대우를 1년 이내에 공중분해하기로 결심했다. 정부는 『경영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기업이 많다』고 쉽게 해명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부의 제한된 눈높이를 표현할 뿐이다. 『시장이 재벌구조를 원치 않는다』면 다른 재벌들도 대우 식으로 해체해 버리겠다는 말인가. 재벌기업들은 살리되 재벌 시스템을 해체하려면 지금 대우를 포함한 모든 재벌들은 아래와 같은 개혁의 수순을 밟고 있어야 한다. 첫째, 각 회사의 주주진 속에 가족이 한사람 이상 있을 수 없게 정리한다. 남남으로 구성된 주주들은 말잘듣는 심복이 아니라 유능한 경영자를 물색하게 될 것이다. 둘째, 공신력 있는 공인회계사들에게 기업을 미국식으로 밀착 감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감사 수임료를 업체별로 차등 부과하도록 해야 한다. 회계 시스템의 신뢰성이 높은 기업에게는 낮은 수임료를, 시스템이 허술한 기업에게는 기업을 포기할 만큼의 높은 수임료를 부과하기 때문에 기업은 엄청난 수임료를 절약하기 위해 투명한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밖에 없다. 네째, 회계 자료에 이상이 생기면 1차적인 책임을 공인회계사에 지우고 형량은 일생을 담보할 만큼 무겁게 지워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을 설치하지 않는 한, 정부는 눈밖에 나는 몇 개의 재벌들만 공중분해시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잘라낸 나무 가지에 새싻이 돋듯 황제식 재벌시스템은 또 다시 무성하게 자라날 것이다. 기업의 투명성도 영원한 공념불이 될 수 밖에 없다. 개혁의 대상이 재벌시스템이냐 또는 실패한 재벌이냐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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