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여초 만에 끝나는 짧은 레이스였지만 우여곡절이 드라마처럼 거듭됐다.
29일 대구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10m 허들 결선. 미국과 중국, 쿠바 3국의 자존심 대결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경기는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흘렀다. 전날 우사인 볼트(자메이카)의 부정출발 충격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실격 처리가 다시 한번 승부를 요동치게 했다.
이날 4레인의 데이비드 올리버(29ㆍ미국)가 두번째 허들에 발이 걸리면서 주춤한 사이 5레인의 세계기록(12초87) 보유자인 다이론 로블레스(25ㆍ쿠바)가 총알처럼 치고 나갔다. 올리버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고 로블레스는 당시 금메달을 땄다. 이대로라면 로블레스의 독주. 관중은 로블레스의 무서운 질주에 탄성을 내질렀다.
두번째 거대한 함성을 일으킨 이는 중국의 영웅이자 아시아의 자존심인 류샹(28)이었다. 류샹은 레이스 중ㆍ후반부터 뒷심을 발휘하며 로블레스를 간발의 차이까지 추격했다. 이후 로블레스와 류샹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 지점은 마지막 10번째 허들. 류샹의 허벅지가 허들을 스쳐 속도가 미묘하게 줄었고 설상가상 로블레스의 팔과 접촉이 생기면서 눈에 띄게 주춤댔다. 관중의 두번째 함성이 세번째에는 놀라움으로 가득한 탄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고 이 사이 로블레스가 1위로 골인했다.
기록은 로블레스가 13초14였고 류샹은 13초27로 3위에 만족해야 했다. 로블레스와 류샹의 치열한 경쟁을 틈타 제이슨 리처드슨(13초16ㆍ미국)이 2위로 들어왔다. 12초94로 올 시즌 기록 1위였던 올리버는 초반 실수를 극복하지 못하고 13초44로 5위에 그쳤다.
3강의 허들 전쟁에서 당당히 승리한 로블레스가 트랙에 비스듬히 누워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사이 류샹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로 아시아 단거리의 신기원을 이룩한 뒤 2007년 오사카 세계선수권까지 제패했던 류샹은 4년 만의 정상 탈환을 노렸으나 불운에 울고 말았다.
그러나 1시간여 뒤 이러한 기록은 전면 수정됐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로블레스에게 실격 판정을 내린 것이다. 사진 판독 등을 통해 9번째와 10번째 허들을 넘을 때 로블레스와 류샹간의 접촉이 확인됐고 진로 방해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리처드슨이 로블레스와 류샹의 싸움 사이에서 행운의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이어 류샹이 은메달로 한 계단 올라섰고 4위(13초44)였던 앤드류 터너(영국)는 뜻밖의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됐다. 3년 전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을 아킬레스건 부상 탓에 불참해야 했던 류샹은 이번 대회를 부활의 무대로 삼았으나 꼬여버린 상황 속에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