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가리봉동도 이 정도 아니었는데"… 답답한 반월·시화공단

시간당 버스 한 대꼴 가로등 부족 등 생활 환경 열악
헛구호 그친 구조고도화사업 총 사업비 70% 줄어
시화드림타운 유찰 등 민간주도형 사업 축소 중단 탓

대중교통이 불편한 탓에 자가 운전자들이 넘쳐나는 반월·시화공단 입구부터 주차된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박재원기자

골목 안쪽 늘어선 차들 옆으로 자동차 딜러들이 걸어놓은 플래카드들이 보인다.

"70년대 가리봉동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때만 해도 서울 도심으로 가는 버스가 10분에 한 대꼴로 있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한 시간에 버스 한 대가 옵니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차를 사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어요."

올해로 시화공단에서 근무한 지 18년째 되는 김남희(56)씨는 아침 출근길부터 답답하다. 승용차로 20분 거리인 시흥시 금이동에 살고 있지만 차가 없는 그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회사에 도착하는데까지 한 시간 반을 소모한다. 김 씨는 "강산이 변할 시간이 두 번 가까이 지났지만 출퇴근 시간만은 달라진 게 없다"며 "교통여건이 70년대 가리봉 공단에서 일하던 때보다 못하다"고 푸념했다.

◇수십년째 대중교통 사각지대

25일 찾은 반월·시화공단은 대로변이나 골목길 할 것 없이 주차 중인 차들이 빼곡히 길을 메우고 있었다. 차량이 집중되는 출근시간에는 월곶IC부터 시화공단까지 약 4km를 지나는데만 30분이 더 걸린다. 서안산IC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근로자들은 길에서 버려야 하는 시간이 더욱 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해도 긴 배차 간격 등 열악한 환경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교통여건 개선이 이뤄지지 않다 보니 너도나도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을 보여주듯 공단 골목마다 '전액 할부 최장 60개월', '계약금 10만원으로 출고까지 OK' 등 자동차 구매를 권하는 플래카드들이 펄럭인다. 아침 출근길이면 서로 작업장과 가까운 곳에 주차하기 위해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주차대란을 피해 아예 출근시간을 한 시간 앞당긴 곳도 있다.

자동차 부품업체에 다니는 김 모씨는 "제각각 사정은 다르지만 다들 없는 형편에 울며 겨자먹기로 승용차를 끄는 경우가 상당수"라며 "월세, 차 할부금 등을 내고 나면 월급이 얼마 남지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호소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과 시흥시, 안산시 등 지자체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12년부터 출퇴근 전용 버스제도를 시범 운영했다. 이후 5개였던 노선은 8대로 확대됐고, 버스 이용객도 약 320여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 셔틀버스 노선이 확대되기는커녕 셔틀버스 사업 예산은 4억8,000만원에서 2억8,000만원으로 대폭 줄었다. 이에 공단 근로자들은 "교통·주차 대란을 막을 방법을 마련하지 않은 채 관련 예산을 축소했다"며 "노선을 늘리고 운행시간을 확대하는 등 개선을 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허울 뿐인 노후산단 개선 사업

힘들게 출근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 현실은 이들을 더욱 답답하게 만든다. 노후 산단을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산업단지로 재창조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출발한 구조고도화사업은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근로자들의 기대감만 키워놨다. 노후단지에 대한 투자 부족으로 근로자의 배움·문화·편익이 보장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겠다며 시작한 사업이지만 3년6개월이 지난 지금 허울만 남은 상태다.

지난 10월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이강후 새누리당 의원이 한국산업단지공단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구미, 남동, 반월·시화, 익산 등 4개 산업단지를 대상으로 추진 중인 노후 산업단지 구조고도화 사업의 사업비 1조2,345억원 중 약 70%의 달하는 금액이 삭감됐다. 특히 반월·시화 지역의 경우 1,648억원에 달하는 사업투자가 무산됐다. 추진 중이거나 완료된 사업도 당초 사업비 2,723억원 중 683억원이 줄었다. 이렇게 반월·시화지역에서 삭감된 사업비 규모만 총 4,199억원에 달한다.

보육·숙박·교육·유통시설 등을 갖추기 위해 추진됐던 시화드림타운사업(322억원) 역시 수차례 유찰되면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반월단지내 지원시설 용지가 단지 면적의 2.5%에 불과하고 50여개의 불법 판매시설(식당 등)이 간이 컨테이너 형태로 난립하는 문제점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런 데도 '구조고도화 사업'은 이름만 바뀐 '혁신산업단지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시작된다. 노후 국가산업단지를 대상으로 3년간 국비 2,000억원, 민자를 포함한 지방비 1,000억원 등 총 3,000억원을 투입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혁신산업단지 사업 역시 QWL(Qulity of Working Life) 사업, 행복산단 사업과 같이 문패만 바꿔 진행되는 것"이라며 "4개 산단에서 시범사업을 하던 QWL이 다시 혁신산단 시범단지로 진행될 뿐 근로자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없다"고 비판했다.

◇근로자 위한 진짜 정책 나와야

'빛좋은 개살구'격인 산업단지 정책에 근로자들의 여건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골목마다 가로등이 부족해 안전을 우려한 근로자들이 콜택시를 잡아타고 퇴근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금속가공업체 총무로 일하는 20대 최 모양은 "출근길에는 근처에 사는 동료의 차를 얻어 타지만 저녁 늦게 퇴근할 때가 많아 어려움이 많다"며 "어두운 골목길을 한참 지나는 것이 무서워 콜택시를 타고 매일 퇴근한다"고 밝혔다.

출퇴근길 애로를 해소하겠다며 만든 자전거 도로는 끊긴 구간이 많고 중간중간 길이 파여 있어 이용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시화공단 옥구천을 중심으로 자전거도로 건설 이후 간혹 자전거로 다니는 근로자들이 몇몇 있지만 그마저도 대로변으로 나오면 자전거 길이 없어 사고위험이 높다.

반월공단의 경우 3년전 안전행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42억원을 투입해 자전거 도로를 건설했다. 공단 내에 19km 구간이 새로 추가됐으며 이와 별도로 안산시에서는 자체적으로 예산을 투입해 자전거도로를 공단 내에 더욱 촘촘하게 깔기도 했다. 그러나 자전거도로는 주차된 차로 가로막혀 사실상 이용할 수 없는 처지다.

전문가들은 산업단지 개선을 위해 공급자 중심 마인드에서 벗어나 미래를 내다 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민간주도형 수익 사업으로 진행해 중간에 사업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본부장은 "산업단지 대책에 대한 접근이 공급자 마인드로 계속 이뤄지는 게 문제"라며 "수요자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되는데 현재는 공단이 섬처럼 떨어져 낙후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개선은 미래를 보고 하는 것"이라며 "장기적으로는 공단이 물건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인식을 탈피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이 자리 잡아서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이 개선되고 인재들이 몰리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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