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 새 물이 흐른 지 두 달 남짓 지났다. 그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장을 직접 보고, 또 느끼고 싶었던 열망들이 그렇게 높았던가. 그동안 1,000만명을 넘는 시민들이 청계천을 다녀갔다는 소식이 놀라울 뿐이다. 단순 산술로도 우리 국민 네 사람 가운데 하나 꼴이라는 셈이 나온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푸르디푸른 물. 그 여울에 물고기가 숨을 쉰다. 풀꽃 따라 바람 길 따라 새가 난다. 그리고 세월 속에 켜켜이 묻어둔 고된 시간들…. 힘겨웠던 일상마저 그리움으로 다가올진대 그 삶은 너그러운 긍지를 가져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우리네 고운 심성의 추억이 복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은 청계천이다.
청계천의 다른 이름은 개천이었다. 개천에는 특히 가난한 도시 서민들의 애환이 투영됐다. 조선시대에도 그랬고 광복 이후 개발시대에도 그랬다.
18세기 중반, 인구 10만명 규모로 계획되었던 한양에는 이미 20만명이 살고 있었다. 도시 빈민 문제가 조정의 골칫거리로 대두되었다. 조정에서는 유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는 쇄환책(刷還策)을 시행했으나 반발만 커질 뿐 별무효과였다.
이때 영조(英祖) 임금의 혜안이 번득였다. 대규모 공공공사로써 빈민을 구휼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난 1760년 두 달에 걸친 청계천 준설 공역에는 연인원 21만명 정도가 동원됐다. 이들 중 관료ㆍ군병 등을 제외한 6만3,300명에게 쌀 2,300여섬과 5만5,000여냥의 돈을 임금으로 지급했다. 한양 빈민들에게 알토란 같은 생활자금이 되었음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18세기 서양의 애덤 스미스(A. Smith)가 사회간접자본(SOC)의 효용성을 이론으로 정립했다면 같은 시대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시설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 실천됐던 것이다. 그 실천의 장은 청계천이었다. 그리고 2005년, 오늘의 청계천은 한국 건설산업의 ‘환경 창조적 개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쟁력을 전세계에 실증하고 있다. 국민들의 청계천 사랑에 비례해 건설하는 사람들의 자부심도 되살아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