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레이건 대통령 이후 처음… 미국 내 보호무역주의 논란일 듯
삼성전자의 특허 침해로 애플 제품의 미국 수입을 금지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판정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 1987년 이후 미국 대통령이 ITC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삼성과 애플의 특허소송은 물론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3일(현지시각) 마이클 프로먼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ITC가 판정한 애플 제품의 수입금지 결정을 무역정책실무협희회(TPSC), 무역정책검토그룹정책그룹(TPRG) 등 관련 기관과 다방면으로 검토한 결과 이를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ITC 판정에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애플은 삼성전자의 특허침해 판정을 받은 스마트폰 ‘아이폰4’, ‘아이폰3GS’, ‘아이폰3G’와 태블릿PC ‘아이패드2’, ‘아이패드’를 계속 수입해 미국에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앞서 ITC는 6월 삼성전자가 애플을 상대로 제기한 특허침해 소송에서 애플의 일부 제품이 삼성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오바마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은 USTR에 60일 이내에 거부권 행사 여부를 통보했다. USTR은 최종 시한인 3일 오전까지도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아 오바마 대통령이 ITC의 판정을 수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이날 오후 3시 전격적으로 거부권 행사를 발표했다.
USTR의 이번 결정은 지난 1987년 이후 25년 만에 미국 정부가 ITC의 판정을 거부했다는 점에 이례적이다. 당시 ITC는 샤프, 도시바, NEC, 삼성이 미국 반도체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이들 회사 제품의 미국 수입금지를 판정했으나 레이건 정부는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초 예상과 달리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미국 의회와 기업이 대대적으로 애플을 옹호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미국 공화당 소속 마이크 리 상원의원은 ITC의 최종 판결을 1주일 앞둔 5월 24일 어빙 윌리엄슨 ITC위원장에게 “표준특허가 된 문제가 된 사건에서는 공익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이어 7월에는 애플이 “예정대로 오는 8월 5일부터 ‘아이폰4’ 등에 대한 수입금지 명령을 적용하면 애플 제품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우려가 있다”며 미국 행정부를 향한 압박을 이어갔고 같은 달 미국 최대 이동통신사 버라이즌도 “오바마 대통령이 ITC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삼성과 같은 단말기 제조사들이 특허를 전략적 무기로 사용해 경쟁사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 사격에 나선 바 있다.
미국 정부가 독립적 권한을 보장하는 준사법기구인 ITC의 결정을 무시하고 애플의 손을 들어준 것은 오바마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한층 거세지고 있는 미국 보호무역주의의 단면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ITC로부터 수입금지 판정을 받은 애플의 제품이 구형임에도 애플의 주요 수익원인 반면 오는 9일 최종 판정을 앞둔 삼성전자는 대상 제품이 사실상 단종됐거나 단종을 앞둔 제품이어서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은 “인도와 같은 신흥시장에서 ‘아이폰4’는 오히려 판매량이 늘고 있다”며 “애플에게는 안드로이드 진영과 맞서는 ‘비밀병기’와 같은 존재”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행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해 즉각 항소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현재 관련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삼성전자의 특허권 보호를 위해 모든 법적인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문송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거부권 행사는 IT 산업에서 갈수록 거세지는 미국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라며 “미국 정부가 애플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특허소송을 둘러싼 삼성전자와 애플의 물밑 협상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