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레콘(PARECON) 마이클 앨버트 지음/ 북로드 펴냄
바야흐로 `참여`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10여년전만 해도 사회적 여론 형성과정에서 `소수`에 불과했던 노동자, 농민, 빈민 등의 이해집단들이 이제는 정책결정과정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동자나 농민들이 한번 시위를 하면 대통령까지 나서 사태의 종결을 호소하는가 하면 이미 결정한 정부의 정책 내용을 바꾸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재개발지역의 세입자나 거주자들에겐 정부의 장기 임대주택이 우선적으로 분양되고 노인층이나 저소득층에겐 최저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얼마간의 생계보조비 지급이 당연시되고 있다.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숨죽여 지냈던 여성들도 이제는 `성 두개 쓰기`운동을 벌이거나 호주제 폐지문제를 본격 거론하고 있다. 장애자나 동성애자, 또는 독신자 등 특수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들도 제작기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주장하며 정부에 보호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은 지난 10년새 우리가 경험해 온 급속한 민주화와 정보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개인의 권리의식이 크게 신장하고 특정분야에 대한 정보의 독점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개인의 증가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는 이전 시대의 근엄과 권위, 규범과 질서로 포장됐던 모든 가치들을 그것이 가진 위선과 불합리, 불공정과 불투명을 이유로 모조리 폐기처분하고 있다.
그래도 사회가 균형을 잡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뤄 나가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가이드라인 같은 게 있어야 할 것은 자명하다. 이미 우리사회에서 참여사회, 참여정부 같은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고 있지만 이번에 나온 `파레콘(PARECON)`은 본격적으로 참여경제의 이론적 기초를 구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국 아메리카대학 정치경제학 교수로 있는 마이클 앨버트는 미국의 진보적 사회단체 Znet의 지도자중 한 명인 로빈 해넬과 함께 공평성,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생태적 균형 등의 가치에 기초해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파레콘, 즉 참여경제(Participatory Economics)를 주창한다. 그는 이 책에서 참여경제란 평등한 소유권, 노동자들과 소비자들의 합의, 새로운 노동조직, 균형적 보상체계와 생산ㆍ유통ㆍ소비과정의 종합관리 등을 주요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체제라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시장이나 계획, 경쟁이나 통제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지배되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 참여적 계획과 공유에 토대를 두는 포괄적인 대안사회를 상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참여경제는 자본주의는 물론 기존의 시장사회주의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생태지역주의 등의 대안들과도 일정정도 거리를 둔 새로운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으로 대표되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지적 허탈감과 전지구적 세계화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평등과 참여를 지향하는 새로운 국제적 연대를 모색해 왔다는 저자는 파레콘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새 제도는 계급의 분열을 야기해서도 안 되고, 어느 한 계급의 지배를 초래해서도 안된다. 그 제도들은 사회내의 공평성, 다양성, 연대, 자율관리를 방해하지 않고 끊임없이 증진시켜야 한다.” 저자는 또 세계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대신 국제자산기관(IAA), 세계은행대신 세계투자지원기관(GIAA), 세계무역기구(WTO) 대신 세계무역기관(WTA) 등을 설치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 전반에 흐르는 미국내 좌파적 분위기는 저자가 주장하는 참여경제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 주장은 물론이고 노동자평의회와 소비자평의회를 결성, 구성원들이 무엇을 얼마만큼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 생산하고 소비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냉전시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가 비록 경제주체들간에 적대감과 차별을 부추키고 문화적 가치들을 획일화시키는 세계화에 반대하고, 구성원들이 권력이나 재산이 아닌 오로지 노력과 희생에 의해서만 보상을 받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고는 있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참여경제`가 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될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동호기자 easter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