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구조조정 명과 암] 사외이사제도

지난 9월말 열린 SK텔레콤 이사회. 경영진이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외이사들이 『계열사에 지원한 2,000억원의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경영진은 계열사의 어려운 사정도 설명했다. 그후 2시간이 넘는 격론. 결국 경영진은 사외이사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외이사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외이사의 반란」으로 불리는 SK텔레콤의 사례다.이를 계기로 올해부터 시험대에 오른 사외이사제가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기업의 투명한 경영을 위해 도입된 이 제도가 오너나 경영자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장치로 새로운 바람을 몰고오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SK텔레콤과 같은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직도 안건이 상정되면 일사천리로 통과되는 것이 현실이다.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분석이다. 사외이사제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투명한 기업경영을 관철하기 위한 장치임에도 제 기능을 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그러나 「한 술 밥에 배부르겠느냐」는 말처럼 지금은 시행착오의 과정이고, 반드시 정착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외이사제는 지난 2월 증권거래소가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의 건의를 수용, 올부터 상장법인의 사외이사 선임을 의무화한 것이 출발점. 내용은 올 주주총회에서 반드시 1명이상의 사외이사를 선임해야 하고, 내년부터는 총 이사 중 25% 이상을 사외이사로 둬야한다. 이미 96년부터 현대그룹의 일부 계열사들이 사외이사제를 시행해왔다. 현재 600개에 이르는 상장사들이 전문경영인·변호사·세무사·연구원·회계사 등으로 구성된 총 769명의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사외이사제는 어찌보면 걸음마단계고, 아직 기대에 못미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사외이사제 도입이후 여기 저기서 이사회가 변화하는 조짐이 보인다. 과거처럼 당연히 통과될 것으로 믿고 상정했던 안건이 사외이사의 이의제기로 보류되는가 하면 사외이사의 깐깐한 질문과 요구로 경영진들이 쩔쩔매는 사례가 간혹 일어나고 있다. 지난 7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분규가 심각한 상황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은 정리해고를 무조건 강행하겠다는 경영진에 제동을 걸어 상당부분 관철시켰다.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천명한 LG그룹에서도 사외이사의 활약상이 돋보인다. 구본무(具本茂)회장 주재로 열리는 LG화학과 LG전자의 이사회가 사외이사들의 깐깐한 질문으로 보통 3시간을 넘기고 있다. 신제품개발계획·인재확보·사업구조조정 방안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회사측의 복안을 따져 물어 경영진의 진땀을 빼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대주주의 경영독단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지금, 사외이사가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는 한계가 있다. 올초 대기업 주총에서 선임된 사외이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경영감시자」 보다는 「초빙명예직」성격이 짙다. 오너와 친분이 두텁거나 기업이나 학계, 관계에서 고위직을 거친 인사들이 대거 선임됐다. 대주주가 사외이사 후보를 선정하다보니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외이사제도가 의무화됐지만 최근 선임된 사외이사 중 18%가 대주주와 관계가 있거나 전직임원이다. 또 전체의 70%가 경영실무를 잘모르는 비전문가들이다. 장하성(張夏成) 고려대 교수는 『독립적인 사외이사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선임절차를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며 『소액주주들이 직접 추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단경영의 견제장치로 등장한 사외이사제를 어떻게 수용해 경쟁력을 높일것인지의 선택은 이제 각 기업들의 몫이다.【김기성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