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를 놓치면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회하게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시빌레 이야기는 기회의 중요성을 잘 일깨워준다. 시빌레는 뛰어난 예지능력을 가진 무녀(巫女)다. 어느날 시빌레는 아홉 권의 책을 들고 왕을 찾아갔다. 그녀는 “책 속에 왕국의 미래가 담겨 있다”며 책값으로 금화 10달란트를 요구했다. 왕은“너무 비싸다”며 사지 않았다. 시빌레는 돌아가 세 권의 책을 불에 태운 후 나머지 여섯 권을 들고 다시 왕을 찾아 왔다. 그녀는 이번에도 책 값으로 금화 10달란트를 달라고 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시빌레는 다시 세권의 책을 더 태우고 달랑 세권만 들고 나타나 10달란트에 사라고 했다. 왕은 다급한 마음에 세권의 책을 10달란트에 사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미래의 일부에 불과했다. (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늦춰지는 구조조정
올 들어 경제정책의 키워드가 ‘구조조정’에서 ‘일자리’로 바뀌는 분위기다. 한달 사이에 실업자가 10만명 이상 늘어날 정도니까 고용확대가 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고용사정이 지금보다도 악화되면 정말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소비위축으로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는 것은 물론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아버지마저 직장을 잃으면 당장 생계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 구조조정’이 뒷전으로 밀려나서는 곤란하다. 착실한 구조조정은 오히려 중장기적으로는 고용확대에도 기여한다. 당장은 문을 닫는 기업이 생기면서 실업자를 늘릴 수 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상당수 기업을 살려낼 수 있고 살아난 기업은 경기가 호전되면 일자리를 늘린다.
정부 당국자들은 최근 들어 “구조조정은 기업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건실한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은 솎아내야 한다. 건실하지 못한 기업을 살려두면 다른 기업들까지 죽이게 된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은 못할 게 없다. 운전자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제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내다판다. 이런 기업의 제품이 팔리면 멀쩡한 기업조차 판매부진으로 고전하게 된다. 결국에는 같은 업종 내의 모든 기업이 부실의 늪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구조조정은 서둘러야 한다. 구조조정을 늦추는 것은 병을 키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실 기업은 늘어나고 부실 처리를 위해 쏟아 부어야 할 재정자금 규모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
때를 놓치면 희생도 늘어
현재 상황은 정말 걱정스럽다. 실물경기 침체와 함께 부실 덩어리도 확대되건만 구조조정은 지연될 움직임이다.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을 강조한다. 채권단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다. 구조조정은 해당 기업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은행도 피를 흘려야 한다. 대출 부실로 자산 건전성은 악화되고 대손충당금 적립 규모도 늘어 수익성을 떨어뜨린다. 말로는 구조조정을 외쳐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든 이유다.
정치권과 학계에서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정부도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실업자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구조조정은 ‘쓴 약(藥)’이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정부가 구조조정을 주도할 경우 온갖 사회적 압력을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간다. 정부가 나서 옥석 구분 없이 모든 중소기업 대출의 만기를 연장해주도록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빌레의 요구를 즉시 수용했다면 왕은 아홉 권의 책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똑같은 값을 치르고도 손에 넣은 것은 3분의1에 불과했다. 기회를 놓치면 엄청난 손해를 보는 줄 알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그게 인간의 한계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