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姓경영

왕조의 기초는 혈통이다. 왕조의 혈통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역성(易姓) 혁명`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것이 대표적인 역성혁명이다. 왕건이 세운 고려왕조는 475년 동안 지속됐다. 조선왕조는 고려보다 더 길어 519년을 지속했다. 신하와 척족들에 의해 왕권이 찬탈당하기도 했지만 왕씨와 이씨 두 왕조로 100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같은 기간 중국의 원(元)왕조가 97년, 명(明)ㆍ청(淸)왕조가 각각 276년 지속됐다. 완강한 혈통중시 경영 이 같은 전통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혈통에 대한 집착이 유별난 데가 있다. 지금도 한반도의 북녁은 김일성ㆍ김정일 부자세습체제로 50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는 것도 그런 전통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민주선거제도의 도입과 함께 한국의 정치에서 혈통주의도 끝났다. 그러나 경제권력을 대표하는 기업에서의 혈통주의는 아직도 완강하다. 자본주의 경험이 일천하다지만 창업 100년이 넘는 기업도 나오고 있고, 4세 경영체제에 이른 기업도 있다. 이런 기업들의 경영권 승계 형태를 보면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대부분 혈통주의 승계 방식이다. 기업상속 과정에서 불법과 편법이 동원돼 물의를 빚고 있는 것 또한 공통적인 현상이다. `믿을 것은 자식밖에 없다`거나 `피는 물보다 짙다` 는 통념의 포로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정부는 기업개혁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 지배구조의 투명성이다. 기업들도 그런 방향에서 전문경영 투명경영을 확보하기 위한 내부적 외부적 통제장치들을 도입하고 있다. 그런 제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이 기업경영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 같은 불신의 근본적 원인도 기업세습 관행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진국의 기업 중에도 세습되는 경우가 없지않으나, 대세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청교도정신 탓도 있지만 자녀에게는 먹을 만큼만 물려주고 재산의 대부분은 사회에 환원하고, 기업을 키우는데 쓴다. 미국 정부가 상속세를 없애겠다고 하자 부자들이 나서서 이에 반대했다. 부자들은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2세를 망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하기야 전문경영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듯 2세 경영이 실패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잘 훈련되고 능력이 검증된 2세 경영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세습이나, 소유와 경영의 일체화와 같은 한국식 경영을 성공적인 경영방식으로 높이 평가하는 외국의 학자들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혈통이 선택의 기준이 되면 경쟁제한적이 될 수 밖에 없다. 혈통이라는 지극히 감성적인 요소 앞에선 능력이나 자질 같은 이성적 요소는 무색해 지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적 현실에서 역성경영은 처족이나 외척이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에 가능해진다. 그것은 혈통경영의 변종이지만 그런 식으로 기업들은 분화해 가고 있다. 역성경영이 의미를 가지려면 혈통 보다는 자질과 능력으로 경영자를 선택하는 진정한 전문경영 시대가 열려야 한다. 전문경영 아직은 요원한 과제 요즘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정상영 KCC명예회장과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간의 공방도 내막이야 여하튼 외양은 혈통 대 역성의 갈등 양상이다. 정상영회장은 현대 가(家)의 정통성 수호를 표방하며, 자신의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장악이 범(汎) 현대 가의 지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변종 혈통경영에도 이처럼 싸움이 치열하니 진정한 의미의 역성경영은 한국의 기업환경에선 아직은 요원한 과제일 듯 하다. <논설실장 imj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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