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잠사회관에서 만난 이동필(사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표정에는 여유 대신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지난해 쌀 목표가격을 둘러싼 논란으로 진땀을 뺀 데 이어 조류 인플루엔자(AI) 사태까지 연달아 터지면서 농업 선진화에 쏟아야 할 내부역량이 분산됐다고 느끼는 듯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쌀 관세화(시장개방) 등 굵직한 통상 변화가 예고된 상황에서 자칫 중심을 잡지 못하면 농업혁신을 향한 행보 역시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다.
이 장관은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민과 농업인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시급히 창출해야 한다"며 "올해는 농정(農政) 분야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대기업의 농업 분야 참여는 농업경쟁력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 장관은 그러나 "대기업이 직접 영농에 나서는 것보다는 연구개발(R&D) 등 기술 분야에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담=권구찬 경제부장 chans@sed.co.kr
물론 농업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그의 앞에 놓인 숙제들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오는 6월까지 입장을 정리하기로 한 쌀 시장개방 여부를 두고 찬반양론이 벌써부터 치열하게 맞부딪히고 있다. 한쪽에서는 쌀 시장을 열어도 큰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식량안보'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구체적인 양허품목을 두고 실무협상이 진행 중인 한중 FTA도 언제든 '뜨거운 감자'가 될 수 있다.
모든 부처가 매달리고 있는 규제개혁에서도 올해 안에 가시적인 성과물이 나와야 한다. 그는 "농식품부 공무원들이 농정 전반에 대해 주인의식·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민감한 주제인 쌀 시장 개방에 대해 이 장관은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우리나라는 내년 1월1일부터 쌀 시장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농식품부는 당초 쌀 시장을 여는 방안과 웨이버(Waiver·일시 의무면제) 협상을 통해 시장개방을 유예하는 방안 등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저울질을 해왔다. 하지만 한국과 비슷한 처지인 필리핀이 WTO와의 웨이버 협상에 실패하면서 우리나라 역시 시장개방 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형국이다. 한국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체결 이후 2004년까지 쌀 시장 개방을 10년 동안 미뤘다가 2004년 재협상을 통해 다시 한번 관세화를 유예했다. 그 사이 반대급부로 제시한 쌀 의무수입물량(MMA)은 올해 기준 40만8,700톤까지 늘었다. 이는 연간 국내 소비량의 8%에 달하는 막대한 물량이다.
이 장관은 쌀 시장 개방과 관련해 "내부적으로 치열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며 "사회적 갈등을 키우지 않으면서도 농민과 쌀 산업 전반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쌀 시장 개방 여부를 9월까지 WTO에 통보해야 하며 이에 앞서 6월 말까지 정부안을 최종 결정할 계획이다.
쌀 시장 개방으로 최종 입장을 정리할 경우 관세율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정할지가 최대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관세율을 높게 잡으면 수입쌀 가격이 그만큼 높아져 쌀 산업을 보호하는 데 유리하다.
국내 쌀값을 보면 중국산보다 2.1배가량 높고 미국산보다 2.8배 비싸 관세율이 300% 수준만 돼도 국내 소비자들이 수입쌀을 구매할 유인이 거의 없을 것으로 분석된다. 이 장관은 "쌀 수입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면 가능한 한 최대치의 관세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하지만 WTO의 검증을 통과할 수 있는 합리적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며 "다양한 가격자료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미국 등 주요 쌀 수출국은 100% 미만의 관세율을 요구할 가능성이 커 정부의 강한 협상력이 요구될 것으로 예상된다.
쌀 시장 개방에 따른 피해가 발생할 경우 특별긴급관세(SSG)를 부과해 시장 보호에 나서는 방안도 추진할 방침이다. SSG는 수입물량이 일정 기준 이상으로 치솟을 경우 관세의 3분의1까지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수입쌀에 대한 관세율을 300%로 정했다고 가정하면 추가로 100%의 세금을 더 물리는 식이다. 이 장관은 "국내외 쌀값 차이와 관세율, 소비자 선호 등을 고려하면 쌀 시장이 개방돼도 현재 의무수입 물량을 초과하는 수입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쌀 가공산업을 육성하고 고품질 품종을 개발하는 중장기 대책과 더불어 단기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논란이 됐던 대기업의 농업 참여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했다. 대기업이 직접 영농에 나서는 것은 가급적 자제하되 R&D 등 기술 분야에서 대기업이 할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장려하겠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지난해 토마토 농사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포기한 동부그룹의 사례를 보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아 안타깝다"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농업 분야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면 과감히 안내해 길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삼성의 경우 고(故) 이병철 회장이 초창기 양돈사업을 시작해 상당한 기술적 진보를 이뤄내고 1세대 양돈업자들을 배출해냈다"며 "기업의 역할이 이런 곳에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가 스마트 온실 기술을 개발해 농가에 지원하는 방식을 이 장관은 사례로 들었다.
반면 농업계의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농협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농협이 공공기관은 아니지만 농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유통시장의 경우 이마트 등 대형유통업체의 시장 점유율이 커지고 직거래 비중도 늘어나는 추세인데 농협이 스스로 개혁하지 않고는 점점 설 땅을 잃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농협이 농민들에게 인정받는 조직이 되지 못한다면 (직원들이) 돈을 많이 받아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조직이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장관이 생각하는 농업 선진화의 첫걸음은 모든 농업경영체의 데이터베이스(DB) 등록이다. 한 농가가 보유한 농지의 면적과 작물 종류, 보조금 지급내역 등을 온라인에 등록해 전산화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110만 농가와 40만개 농업법인을 합쳐 총 150만개 농업경영체에 대한 등록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등록률은 약 54% 정도다. 그는 "일반국민들이 생각하기에 농가에 이것저것 많이 퍼주기는 하는데 밑 빠진 독 아니냐, 누가 중간에 빼먹지 않느냐는 지적을 많이 한다"며 "일단 DB화가 이뤄지면 각종 보조금과 면세유 등이 어떻게 지급되고 쓰이는지 파악할 수 있어 재정투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DB 작업이 마무리되면 쌀 시장 개방, FTA 등 당면 과제에 대해서도 수월한 대응이 가능해질 것으로 이 장관은 내다봤다. 그는 "전업농들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농식품부에 배정된 예산을 맛있게 쓸 수 있어야 한다"며 "DB를 통해 농가별 경영진단을 실시하고 맞춤형 전략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FTA 시대에 대응해 국내 농업의 해외 시장 진출도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그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중국에 '치맥' 열풍을 일으킨 전지현씨와 박지은 작가에게 감사패를 수여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면서 "한류를 활용해 우리 농식품을 중국·동아시아 시장에 집중 홍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5월 우리나라가 구제역 백신 접종 청정국 지위를 획득할 예정인데 이렇게 되면 축산품 수출도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과 관련해서는 남한의 앞선 농업기술이 북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장관은 "양돈사업을 보면 우리나라는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반면 과밀화돼 있어 분뇨 문제 등이 발생한다"며 "반면 북한 유기질 비료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보완관계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온실이나 비닐하우스 등과 관련한 기술도 북한 농업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농촌경제연구원에서는 개성공단 인근에 '복합농업단지'를 조성해 북한 농촌의 식량·소득·생활환경을 동시에 개선하자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며 "통일부와 의논해 구체적인 추진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He is …
△1955년 경북 의성 △1978년 영남대 축산학과 △1981년 서울대 대학원 농업경제학과 △1991년 미주리대 농경제학박사 △2000~2011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정보관리실장·지식정보센터장·기획관리실장 △2006~2012년 농림수산식품부 규제심사위원장 △2011~2013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 李장관은
가시 뽑아 귀농지원·주류산업 활성화 '규제완화 전도사'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농촌경제연구원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규제완화의 전도사로 잘 알려져 있었다. 농업 분야의 덩어리 규제를 풀어야 식품가공 등 관련산업이 활성화되고 농가 소득이 늘어난다는 게 이 장관의 지론이다.
1차 산업인 농업에 제조업(2차 산업)과 관광·서비스업(3차 산업)을 더하자는 이른바 '6차 산업'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는 장관 부임 이후 술 산업과 관련한 규제를 집중적으로 풀어 전통주 포장비용의 세금부담을 낮추는가 하면 소규모 맥주의 외부유통을 허용하기도 했다.
다만 이 장관은 규제완화의 양(量)보다 질(質)이 더욱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농식품 분야의 규제를 집계한 결과 81개 법령과 행정규칙에 총 940건의 규제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며 "다만 기계적으로 숫자만 줄이는 규제완화는 농가와 농업 전반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어려운 만큼 실효성 있는 규제를 풀도록 조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맞춰 농식품부는 다양한 규제완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 공직자에게 3만원 이상의 화환이나 꽃 선물을 할 수 없도록 했던 공직자 행동강령의 업무편람을 삭제하도록 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메뚜기와 누에번데기로 한정돼 있는 식용곤충의 범위를 갈색거저리·흰점박이·꽃무지 등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이 곤충들은 모두 민간에서 식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귀농·귀촌자도 시설사업 융자, 쌀 직불금 지급 등 정부 지원사업을 얻어낼 수 있도록 관련 절차를 개선하고 복잡한 우수농산물관리제도(GAP) 인증절차도 완화하기로 했다.
농민들이 민원이 많은 농지규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이 장관은 "농지 관련 규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며 "다만 농지로서 기능을 못하는 자투리 땅은 지역 실정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집단화된 우량농지와 간척지는 최대한 보전하는 게 원칙이며 농지규제심사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