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고, 여행기와 사진을 엮어 책을 내고, 그렇게 번 돈으로 다시 여행을 하는 여행 작가의 삶도 동경한다.
그러나 대단한 용기가 있거나 유명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삶은 대개 꿈 혹은 다른 이의 여행기를 통한 대리만족에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 여행 작가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어느 한 개인이 지난 십 년 간의 여행기록을 묶은 ‘여행 탐구 일기’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여행은 왜 하는가?’, ‘여행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이미 그럴싸한 대답을 할 준비가 돼 있다. 모든 여행은 멋지고, 의미가 있다고. 그러나 이세미 작가의 여행탐구 일기’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운을 뗀다.
‘여행을 많이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믿었던 건 어린 시절의 착각’
저자는 부모님의 신혼여행으로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좋았던 추억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도 사진과 차표 등 신혼여행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엄마가 간직하고 싶었던 것은 왜곡된 낭만의 추억이 아니다. 좋았건 나빴건 기억이 부정되지 않은 그녀의 삶 자체다라는 생각에 갑자기 엄청난 비밀을 깨달은 것 같았다”라고 말한다.
이런 담백한 맛과 어울리게 ‘여행 탐구 일기’는 독특한 구성을 띠고 있다. ‘여행 일기를 여행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과거의 여행 일기를 읽고 추억과 기억을 되짚으며 여행의 다양한 면면에 대해 다시 일기를 쓰는 방식이다.
각 장은 나라, 도시, 시간이 아닌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와 생각 별로 나눠져 있다. 크라프트지 배경으로 통일된 과거 일기 그리고 연이어 배치된 당시의 사진과 일기 속 그림을 지나면, ‘현재의 나’가 풀어놓는 여행의 뒷얘기, 사색, 소소한 수다가 펼쳐진다.
‘여행 일기를 써야지’ 하면서도 막상 여행지에서 숙소로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 그냥 퍼져버렸던 순간들. ‘사진으로 모두 남겨야지’ 하면서도 카메라를 꺼내기 귀찮아 지나쳤던 장면들. 이 모든 것들이 십 년 후 나에게 이렇게 또 다른 의미의 여행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보는 건데 하는 아쉬움을 뱉어 놓는다.
책 속에는 ‘그 거리에서 나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이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변화하자고 다짐했던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더라도 좋으니 그 약속 자체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는 기억과 아쉬움이 담겨있다.
스무 개가 훌쩍 넘는 나라들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가봤던 나라들에서 내가 만났던 나를 떠올린다.
저자의 여행을 쫓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나를 찾게 되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그리고 책의 끝에 이르러 부록으로 실린 ‘한 줄 그림일기’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연필을 들어 페이지의 여백에 한 줄 적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다음 여행을 떠날 때는 깨끗한 노트와 펜을 준비하자고. 1만5000원 /서울경제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