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지록위마(指鹿爲馬)

신용웅 <부품소재투자기관協 회장>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이른다는 얘기다. 윗사람을 농락한다는 매우 나쁜 뜻을 지니지만 실제로 잘못 보거나 그렇게 믿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언젠가는 사슴으로 인정하고 그 비용을 부담하게 될 것이다. 정부가 펼치는 정책도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쉽다. 경제여건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사슴을 말이라 믿고 어려운 지경에 빠질 수 있다. 정부가 새로운 벤처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과거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주춤했던 벤처산업정책에 다시 힘을 모은다니 다행스런 일이다. 과거 벤처산업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창업 및 중소기업정책과의 차별화가 안됐다는 점이다. 정부가 벤처기업을 인증해주는 제도는 시간이 갈수록 5만개 또는 10만개라는 벤처기업의 숫자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내용이 불분명한 벤처기업을 늘려만가다 보니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은 무조건적이 됐다. 결국 내용이 좋지 않은 자금(P-CBO)까지 단기간에 대량으로 살포하는 일까지 생기게 됐다. 그래서 시중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다는 ‘강시벤처’라는 말까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벤처정책은 우선 초점을 보다 높은 곳에 맞춰야 한다고 본다. 벤처가 아닌 것을 벤처기업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벤처기업에 대한 정의를 현재의 것으로 하지 말고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를 기준으로 다시 내려야 한다. 기술선도력이든 시장점유율이든 세계적 기준에서 의미가 있는 기준을 충족시킬 기업으로 정해야 한다. 벤처기업과 창업기업 그리고 중소기업은 확실히 차별화돼야 한다. 경제여건이 변했기 때문이다. 고용정책의 일환으로 벤처정책이 사용되던 때는 지났다. 벤처기업에 2만달러 시대,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이 아닌가. 이들에 역할모델을 기대해야지 구제와 지원을 물어서야 되겠는가. 따라서 새로운 벤처정책 목표를 산업별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정보기술(IT), 생명기술(BT), 부품ㆍ소재 등의 구체적 산업별로 목표로 하는 기업군을 우선 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군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산업별로 수요자 위주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산업별로 요구되는 양질의 투자자금에 맞춰 공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산업별로 진전되는 기술혁신 동향을 면밀히 파악, 이에 따른 선도 기업군을 정의하고 형성하는 것이 새로운 벤처정책의 목표가 돼야 한다. 새로운 벤처정책이 벤처가 아닌 것을 벤처라고 믿고 지원하는 ‘지록위마’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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