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은 천만번 강조해도 아깝지 않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저버린 국가와 민족에 밝은 내일은 기대할 수 없다. 나라가 제대로 성장ㆍ발전하고 국운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가장 절실하다.
출중한 자질과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를 바라는 까닭은 나라가 또다시 어지럽기 때문이다. 국정은 국난에 버금가는 총체적 난관에 빠졌건만 현 집권층에 그러한 비상한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보다 실천 앞선 '준비된 제왕'
그 옛날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집권시 고구려ㆍ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라는 불리한 여건을 딛고 국가 중흥을 이끌었으며 마침내 그의 위업을 바탕으로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진흥왕은 ‘준비된 제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재위 36년1개월 동안 자신의 입으로 자기가 ‘준비된 임금’이라는 소리는 입 밖에도 꺼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흥왕이 처음부터 ‘준비된 제왕’은 아니었다. 천부적 자질을 타고나기는 했으나 그가 즉위할 때 불과 7세의 소년이었으므로 어머니 지소태후(只召太后)가 신라사상 최초로 섭정을 맡았다. 여기에 김이사부(金異斯夫)ㆍ김거칠부(金居柒夫)ㆍ김무력(金武力) 등 당대의 영웅호걸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면서 정치ㆍ군사 양면에서 국력 신장에 앞장섰다.
신라가 화랑제도를 설치, 문무에서 빼어난 인재를 화랑과 그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 가운데서 등용하기 시작한 것도 진흥왕 때였다. 그는 또한 불교를 국교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불법을 통한 국민의 교화와 민심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처럼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화랑과 불교를 양대 축으로 삼아 급속한 국력 신장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진흥왕이 마침내 친정에 나선 것은 재위 12년째인 551년으로 추정된다. 그의 나이 만18세. 그해 정월에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개국 원년에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일으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거칠부를 총사령관으로 삼은 그 싸움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10개군을, 백제는 6개군을 점령했다. 그런데 거칠부는 내친 김에 백제가 천신만고 끝에 70년 만에 되찾은 옛 서울 한성 지역의 6개군마저 암습해 차지해버렸다. 분노한 백제의 성왕(聖王)은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삼국시대를 돌아보면 한강을 확보하고 지배한 나라가 최후의 승리를 차지했다. 그때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다시는 이 땅을 되찾지 못한 반면, 신라는 이를 발판 삼아 삼한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제는 한성 탈환이라는 성취에만 만족해 신라의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대비책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이 또한 오늘날에도 국정 운영의 최고책임자든 기업경영의 총수든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하면 나라와 회사에 손해만 끼치고 그것도 모자라 망쳐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여실히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재위 23년(562)에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고 2년 뒤 서해안의 항구 당항성을 통해 중국의 남ㆍ북조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으며 29년(568)에는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다시 33년(572)에는 홍제(弘濟)라고 고쳐 보다 큰 정치를 펼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진흥왕은 신라 사상 최대판도의 강역을 개척하고 그 지역을 순행하여 척경비를 세우기도 했다. 사후에 황제와 같은 의미의 존칭인 태왕(太王)으로 불린 진흥왕은 재위 37년째인 576년 43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떴다.
무능한 리더는 국가·기업에 재앙
영명한 군주 진흥왕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냉엄한 역사의 교훈과 난세로 접어든 우리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진흥왕과 그의 치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흥태왕은 결코 자신이 준비된 임금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물론 못해먹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실정(失政)을 야당이나 언론이나 다른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천만번 강조하거니와 국가의 최고 과제는 국리민복이요, 지상 목표는 부국강병이며, 백년대계는 올바른 교육이다. 그것도 요즈음처럼 시험 기계나 양산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전인교육, 자주적이며 올바른 역사교육이다.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 이상의 자리에 앉으면 본인뿐 아니라 국가나 회사에도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교훈이요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