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앤 조이] 작가 박인식이 산에 산삼을 심는 이유 [우기자의 로그人] 산삼 씨앗 뿌리는 이유? 땅에 대한 믿음을 살리기 위해서요!나는 휴대폰·컴퓨터·운전면허 없는 '아날로그 인간'22년 간 주머니 털어 전국에 산삼 심어섬으로 인정 받으려 독도에 나무 심기도 우현석기자 hnskwoo@sed.co.kr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ImageView('','GisaImgNum_2','default','260');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로부터 촉발된 경제 위기가 세상을 뒤흔들었던 2008년이 지나고 2009년이 시작된 지도 7일이 지났다. 난국이 수습돼 가는건지 아니면 확산의 초입인지 알 길이 없는 가운데 뜨고 지는 해는 어제나 오늘이나 의구(依舊)할 뿐 이다. 이 팍팍함을 달래기 위해 찾은 원행에 동행했던 산악인이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국 방방곡곡 산에 수십년간 산삼 씨앗을 뿌렸고, 독도를 섬으로 인정 받기 위해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을 벌였으며, 소설을 쓰고, 거의 매일 자신의 와인 바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는 그에게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찾은 그의 블로그에 걸린 글에 베어 있는 필력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와 접촉할 수 있는 길은 인사동에 있는 한 와인바의 전화번호 뿐, 그는 그 흔한 휴대전화 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낮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 와인바로 전화를 건지 5일 만에 그와 통화할 수 있었고 다시 일주일여 만에 그를 그의 와인바에서 만날 수 있었다. -왜 휴대폰이 없으십니까.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제가 전업 작가라서 사람들에게 시달리기가 싫어요. 나는 휴대폰, 운전면혀, 컴퓨터가 없어요.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인간이지요. 나는 불편하지 않은데 가끔 사람들이 그런 사실에 놀라곤 해요. 연락은 공중전화를 사용하는데 요새는 휴대전화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찾기가 힘들어요. ‘공중전화를 찾기가 힘들면 휴대전화를 구입하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와인을 무척 좋아하시나 봅니다. 특별히 매일 저녁 이곳에 들르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약속이 있으면 들르고 없으면 안 들러요. 일년에 반은 파리에서 살고, 나머지 반은 서울에 있지요. 서울에 있을 때는 약속이 있으면 대부분 이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요. 주변 사람들이 인사동 토박이들이어서 여기서 만나는게 편하지요. 술은 가리지 않고 먹는데 아무래도 오래 마셔서 그런지 와인이 제일 좋아요. -와인은 언제부터 드셨습니까. ▦80년 부터 마셨어요. 그 무렵에는 프랑스에서 좋은 와인 구해와서 친구들에게 주면 입맛에 안 맞는다고 소주를 찾곤 했지요. 요즘 와인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로워요. 다른 술들은 곡물로 만드는데 와인은 과일로 만들잖아요. 오래된 나무에서 날수록 좋은 포도주가 되지요. 포도나무 뿌리는 땅속 20미터 아래까지 내려가는데 그래서 그런지 미네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요. 술 중에 유일하게 좋은 술이고 포도 자체도 약용으로 쓰이는 좋은 과일이지요. -하지만 포도주를 과음하게 되면 머리가 아프지 않습니까. ▦발효 술들이 다 그래요. 자기 용량을 넘어서면 그렇지요. 그래도 천천히 마시면 괜찮아요. 느림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를 인터뷰 하기 위한 준비로 그가 쓴 소설 ‘인사동 블루스’를 읽었는데 책 표지에 ‘박인식 실명소설‘이라는 활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었는데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지난 2005년에 실명 소설 ‘인사동블루스’를 출간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실화에 근거하는 겁니까. ▦실제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했지만 내용은 허구가 많아요. 소설의 허구성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안 보려고 하니까 사실적인 느낌을 부여하려고 한거지요. 그를 ‘인터뷰할 만 한 걸물(傑物)’이라고 추천했던 지인은 그를 산악인이라고 했지만 그의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산을 타는 일 말고도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책으로만 접한 그는 부산해 뵈기도 하고, 동키호테 처럼 세상은 안중에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정체를 묻기로 했다. -세간에는 주로 산악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책도 여러 권 내셨고, 그림도 그리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본업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산악인이라고 하지만 본업은 소설가이고 산은 취미에요. 그래도 산에 관한 건 대부분 다 해봤어요. 원정등반, 산악잡지 출간, 산악연극 대본 집필에 연출까지 했으니까요. 97년에는 MBC창사기획으로 24부작 산악드라마를 만들었어요. 그 때 감우성, 김상중, 김지수 , 김미숙 등이 주연을 맡았지요. 원래 제가 희곡을 썼었고, 시민극단에서 연극활동을 했었거든요. 문경에서 산악영화제를 열었을 때는 집행위원장을 했지요. 산과 관련된 모든 장르의 작업을 했지만 그래도 본업은 소설가예요. -엔터테인먼트 기획도 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로 어떤 기획을 하십니까. ▦전국 산에 산삼을 심고 있는 이벤트를 22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고 있어요. 회원은 150여 명 정도 되지요. -선생님은 산악계와 인사동 일대에서는 이름 석자만 내밀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십니다만 대중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계기는 지금 말씀하신 산삼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농(農)심마니 활동을 하시면서 부터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농심마니 활동을 하시게 됐습니까. ▦80년대 초반에 사회 각 분야에서 뿌리 찾기 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어요. 아라비아 사막에 있는 보물이 석유라면 우리나라 땅에 있는 보물은 산삼이에요. 세종실록에 보면 우리나라의 103개 군(郡)에 산삼이 난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중기 이후 산삼이 크게 줄었어요. 중국으로 반출되면서 줄어들었기 때문이지요. 그 이후로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 산악지대의 70%에 해당하는 곳에서 산삼이 날 수 있어요. 우리나라 국토 중 산이 차지하는 면적이 70%인걸 감안하면 전국토의 절반이 산삼 재배가 가능한 면적이지요. 그 만한 면적에서 산삼이 자생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땅에 대한 믿음이 되살아 날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우리시대 마지막 낭만파들을 규합해서 그 일을 시작한 거지요. 누구에게 손 내민 적 없이 우리 주머니를 털어서 시작한 일이에요. 그렇게 하고 나서 우리가 산삼 씨앗을 뿌린 산골마을 중 열댓군데가 심마니 마을로 변했어요. 처음 3년생 묘삼(苗蔘)을 심은 후 22년이 지났는데 그 것들이 살아 남았으면 25년근이 됐겠지요. 새들이 먹어서 똥으로 씨앗이 퍼지는 과정을 통해서 자란 삼을 조복삼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확산 되기도 해요. 지금까지 3만주를 심었는데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을 거예요. 우리나라 산들이 삼밭으로 회귀하고 있는 거지요. 산삼 씨를 뿌리는 일은 지자체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함양군 같은 곳은 축제도 하고 체험활동도 하고, 순천과 화순도 박람회에 때 맞춰 야산을 산삼 밭으로 가꾸고 있어요. 그런 곳에 자문을 해주기도 하지요. 농심마니 일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묘삼을 공급 받는 것이에요.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산삼 씨를 확보하는 건데 씨앗은 삼척 박재영 선생께 공급 받고 있어요. 3대째 심마니를 하고 계신 그 분은 삼을 발견하면 캐지 않고 씨를 받아서 묘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지요. 박선생께서 우리 주머니 사정에 맞춰 묘삼을 공급해 주는 그대신 우리는 산삼 수요자를 그분에게 연결해주고 있어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하다가 산악전문지를 창간해 일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산을 타고 싶으면 산으로 가고,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면서 세상을 거침 없이 살아가고 계십니다. 본인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느끼십니까. ▦ 아직도 더 자유롭고 싶어요.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어요. 욕망은 아직도 철이 덜 든거지요. -얘기가 나온 김에 범속(凡俗)한 질문 하나만 더 드리겠습니다. 51년생이신걸로 알고 있는데 그 동안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 중1때 부터 세상을 살고픈 대로 살았어요. 그 때부터 담배 피우고, 술도 하고 그랬어요. 경북중학교를 전교 2등으로 들어갔는데 어른들이 하라는 건 뭐든지 반대로만 하다 보니 1년도 안돼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장관,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저하고 동기동창이에요. 심지어는 중3때 친한 친구들만 데리고 타히티에 가서 살려고 밀항을 기도한 적도 있어요. 중3때 배를 몰 수 있는 애, 식사당번을 할 애… 그런 애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어떤 애가 고자질을 해서 실패했어요. 나는 내 내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한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월급쟁이도 안 하게 된거지요. 그래서 친구들도 박인식이 밥 먹고 사는게 불가사의라고 해요. 방랑벽이 일찍 들어서 잘 나가던 잡지 ‘사람과 산’을 접었지만 그래도 그 잡지가 창간 전에 정기독자를 5,000명을 안고 시작한 잡지예요. 창간부터 경영이 흑자였는데 2년 만에 선배에게 그걸 넘기고 자유인이 돼서 세계를 떠돌았어요. 산이 있고, 여자가 있고, 그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갔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것은 2000년을 넘어선 이후인데 그래서 2002년에 와인 바를 차렸지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바글댔어요. 지금은 이 곳을 집사람이 운영하고 있지요. 그를 만나기 전 기자는 그에게 ‘당신을 알려면 어떤 책을 읽는 게 좋겠느냐?’는 질문을 했고, 그는 소설 ‘인사동 블루스’를 추천했었다. 하지만 기자는 그 소설 보다도 그의 블로그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산이 부른 환청의 메아리’에 마음을 빼았겼었다. 그 글은 산에서 숨진 대학 산악부 후배 고(故)김혜경씨를 추모하는 글이었다. -이번엔 우울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블로그 첫머리에 보면 ‘산이 부른 환청의 메아리’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산악반 후배인 고 김혜경씨에 대한 추모글인데 장문임에도 빨려 들어가는듯 단숨에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블로그나 책에는 산이나 바다를 탐험하다가 유명을 달리하신 지인들에 관한 글들이 있더군요. ▦책에도 썼지만 바다에서는 이덕영 형을 잃었고, 산에는 대학후배 김혜경을 묻었어요. 살아남은 자의 변명 같은 글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들을 산으로 보내고 바다로 보낸 장본인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산의 아름다움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과장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설악산 어디로 가면 그 곳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했는데 혜경이는 내가 군에 가있는 동안 거기에 갔다가 죽었어요. 덕영이 형은 발해 해로를 답사하다가 죽었고요. 오래 전부터 내가 계획했던 일이었는데…. 형이 죽었을 때 나는 파리에 있었어요. 아마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나도 뗏목을 탔을 거예요. -고(故) 이덕영씨와는 의형제간 이라고 들었습니다. ▦울릉도 송곳바위를 오르고 싶어하는 분이었는데 내가 이끌어 주다가 알게 됐어요. 의기투합해서 의형제를 맺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많은 일을 했어요.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도 함께 하셨지요. ▦독도가 섬으로 인정 받으려면 나무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나무를 심었죠. 발해사(史) 찾기도 하고 농심마니도 하고, 덕영형 하고 많은 일을 했어요. 삼척 두타산 언저리에 땅을 마련해서 정신세계와 현실세계가 공존하는 이상향을 만들려고 했던 적도 있어요. -‘인사동 블루스’ 책 안에는 정용진씨라는 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호랑이는 온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지리산에 한 때 암호랑이 한 마리가 실존했다는 내용인데 신빙성이 있는 얘기입니까. 그렇다면 그 시절에 기사화된 적이 있나요. ▦ 그건 신빙성이 있는 얘기에요. 잡지 ‘사람과 산’을 창간하면서 한국호랑이를 찾겠다는 기획을 했었어요. 매달 ‘사람과 산’에서 호랑이 목격담을 취재를 해서 1년 후에 결론을 내겠다고 결심을 했었어요. 현장을 답사해서 기사를 썼었는데 첫 호에서 외국인 선교사가 암수호랑이 두 마리를 풀어놓았다는 얘기를 듣고 기사를 썼던 거예요. 정씨는 호랑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람과 산’을 보고 찾아 나섰다가 목격한 거지요. -요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은 한국인에게 호랑이는 사라진 왕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마음속에만 있는 존재인데 그게 간절하면 호랑이 처럼 생긴 뭔가가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호랑이를 기다라고 있는 시절이에요. 메시아나 존경할 만한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전방에서 군인들이 목격하고 있는 것은 호랑이는 아니고 표범일 가능성은 있어요. 산삼과 호랑이를 영물이라고 하는데 영성에 대한 그리움에서 집착을 했던거지요. 와인 바 바깥에는 소리 없이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 와인 바 안에 적막과 우울함이 함께 흘렀다. 불현듯 우울한 화제를 바꿔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던진 질문이 그 임무를 완수 한 것 같았다. ▶▶▶ 인기기사 ◀◀◀ ▶ 최고의 '신의 직장' MB정부에 반기 들다 ▶ 일 년에 300억 버는 사람을 보며… ▶ 겉멋에 취한 MB정부? ▶ 구본호씨 수사, LG그룹 번지나 ▶ '조중동 vs MBC'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 "MB 믿었는데… 직원들 길거리로 내몰 수밖에" ▶ "병보다 돈이 무서워" 병원서 도망·자살 ▶ 한국인에게 급증하는 암이 있다는데… ▶ 반기문 총장, 제대로 화났다 ▶ '정몽준 때문에…' 체면 구긴 검찰 ▶ 분 삭이는 친이계 "홍준표 물러나라" ▶ 불법 성인오락실 왜 안 없어지나 했더니 ▶ 정준호, 남몰래 최진실과 약속 지켰다 ▶ 현대차, 미국서 대박 터뜨리나 ▶ '최첨단' 간판이 아까운 동탄 신도시 ▶ 살아보겠다는 서민 죽이는 그들 ▶ 키가 쑥쑥 자라는 신비의 물질 개발 ▶ 공민왕과 왕후는 소원했다? ▶▶▶ 자동차 인기기사 ◀◀◀ ▶ 국산 자동차 팍팍 깎아준다는데 ▶ 제네시스 · 체어맨W 얼마나 잘 팔리나 ▶ 제네시스 쿠페, 뭔가 확 다르다는데… ▶ 새 모델서 레이싱걸까지… 자동차에 관한 모든 것 ▶ 레이싱걸 사진 게시판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