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금융실명제 20년] <하> 차명계좌 금지 공방

뿌리부터 뽑자 vs 문제 드러나면 처벌… 법개정 논란 뜨거워
"거래자체 없애야 비리 차단" 정치권 보완입법 발의 봇물
자녀·동문회 통장도 범죄매도 정부 "선의피해자 발생" 난색
실명제 잘 모르는 국민 많아 공론화 통해 합의 이끌어야


“차명거래의 뿌리부터 뽑아야 한다”(정치권)

“문제가 드러날 때 처벌하면 된다”(정부)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전격 단행했던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금융실명제는‘반쪽 짜리다’는 주장과‘최선이었다’는 반박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국정과제로 내놓고, CJ그룹 이재현 회장 및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를 통한 횡령, 재산은닉 등 굵직한 경제 비리가 잇달아 부각되면서 금융실명제를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여론을 타고 19대 국회는 역대 가장 많은 차명거래 금지법을 발의했다. 야당은 당론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여당 일부도 가세했다.

◇정부, 선의 거래 많아 원천금지 곤란= 정부는 차명금지에 부정적이다. 부모가 자식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등 우리나라 특유의 거래 관행까지 범죄로 매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명거래로 인한 범죄는 현행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지하경제가 더 활성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문회비나 아파트 관리비 등을 대표자 명의 계좌에 관리하는 사례도 많다. 법인을 설립하기 전 공동설립자금 관리를 발기인 대표자 명의로 관리하는 경우도 해당한다.

금융위 관계자는“선의의 차명거래는 계속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고정된 법조문으로 금지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면서“검은 돈을 잡기 위해서라면 차명거래로 인한 범죄를 처벌하고 수익에 과세하는 현행법으로도 충분하다”고 밝혔다.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국회에서“이상은 참 좋은데 현실적으로 참 어려운 부분”이라고 토로했다

실제 올해부터 차명계좌로 이전한 돈은 증여로 추정해 증여세를 매길 수 있는 길을 텄다. 이는 2010년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차명계좌에 대한 종합대책을 내놓겠다고 말한 취지가 반영된 결과다.

◇정치권, 차명금지로 비리뿌리부터 뽑아야=이에 대해 정치권은‘걸리면 잡는다’는 정부의 주장은‘안 걸리면 안 잡는다’는 것과 같다고 반박한다. 차명거래로 인한 범죄가 아니라 차명거래 자체를 금하라는 것이다.

박민식 의원 측은“선의의 차명거래는 제외하면 된다”면서“정부는 이미 부동산 실명제를 시행했고, 돈처럼 움직일 수 있는 미술품이나 중고차도 실명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돈거래만 못한다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꼬집었다. 정치권은 차명거래를 차제에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비리가 뽑힐 수 있다며 강공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실제 7일 국회 법안발의 현황을 보면 19대 국회는 역대 가장 많은 차명거래 원천 금지법을 내놓았다.

국회 정무위원회 여당 간사인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은 차명거래 적발 시 징역형 및 범칙금을 매기는 처벌법을 이번 주 발의한다. 경제학자 출신인 이만우 새누리당 의원 역시 필요하다면 개선안을 담은 법안을 대표 발의할 계획이다. 안종범 새누리당 정책위 부의장도 학자시절 차명거래 금지를 주장했다.

야당은 더욱 적극적이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차명계좌를 통해 넘어간 돈은 차명계좌 명의인에 증여한 것으로 간주하는 내용의 법안을 냈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차명거래가 적발되면 최고 3년 이하 징역형을 내리고 차명계좌를 자진신고할 경우 증여로 인정하는 유인책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다. 김기준 민주당 의원은 금융회사 임직원만 처벌하게 한 현행법이 형평에 어긋나다며 실제 차명거래자인 고객도 처벌할 수 있는 법 개정안을 냈다.

◇공론화 통해 국민합의 이끌어야=차명금지를 둘러싼 공방이 치열한 만큼 충분한 공론화를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고 큰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현재의 금융실명제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알려진 점도 문제다. 차명거래가 전면 금지된 것처럼 알고 있는 국민이 많기 때문이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1993년 금융실명제 실시 직후 국민이 계좌의 97%를 실명으로 전환한 이유는 차명거래가 원천적으로 금지되는 줄로 착각했기 때문”이라면서“현재 금융실명제 내용을 국민이 제대로 모른다는 게 더 문제”라고 비판했다. 금융실명제가 일반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공개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하경제가 되레 더 커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금융위와 정치권의 생각은 엇갈린다. 금융위는 차명거래 자체를 처벌하면 중산층을 중심으로 금융계좌가 아닌 5만원권 현금이나 금괴를 구입하는 경우가 늘어난다고 지적한다. 최근 금융정보분석원(FIU)법이 통과하고 개인의 금융거래 일부가 국세청에 통보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은행 등 금융회사를 통한 돈 거래가 크게 줄어든 것이 비슷한 예다. 조세연구원 보고서에서도 지하경제 양성화 효과는 금융실명제보다 현금영수증 및 신용카드 소득공제가 더 낫다고 분석하고 있다.

반면 정치권은 과거 금융실명제 실시를 반대하던 논리와 똑같다고 비난한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할 당시 통화량이 줄어 지하경제가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후, 은행 총 예금은 그해 12월까지 매달 0.5~2% 가량 늘었다. 총 통화에서 현금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명제 직후 8%에서 10%로 올랐으나 두 달 만에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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