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5월7일 오후1시. 프랑스군 1만1,721명이 베트민(월맹)에 손을 들었다. ‘백기는 들지 않겠다’는 조건부 항복으로 프랑스군이 떠난 자리에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구호가 쓰여진 월맹군의 군기가 펄럭였다.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가 종결된 순간이다. 디엔비엔푸가 싸움터가 된 것은 수세를 일거에 만회하자는 프랑스군의 전략 때문. 디엔비엔푸에 인공 요새를 만들고 신식 무기를 배치한 후 적을 유인한다는 계산은 월맹군의 치밀한 대응으로 빗나갔다. 개미굴 같은 보급로 운영으로 병력과 장비를 모은 월맹군은 공격 감행 56일 만에 전투를 끝냈다. 식민지의 유럽에 대한 기적적인 승리는 알제리 독립운동 등 제3세계의 자각을 일깨웠다. 1955년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ㆍ아프리카 비동맹회의도 이 전투의 영향을 받았다. 디엔비엔푸의 결전으로 프랑스 제국주의가 쫓겨난 자리에는 미국이라는 새로운 외세가 들어왔지만 베트민은 미군마저도 결국 이겨냈다. 미국의 1971년 금태환 포기에도 월남전 비용 누적에 의한 재정 악화가 요인으로 작용했다. 통일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분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떻게 프랑스와 미국ㆍ중국을 연파했을까. 애국심 덕분이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비행기로 장비를 공수하는 동안 월맹군 병사들은 몸에 대포의 포신을 묶고 한번에 1인치씩, 하루에 반 마일씩, 3개월에 걸쳐 대포를 운반했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레바퀴에 몸을 던져 죽어가면서까지 병사들의 식량을 구한 처녀도 있다. 베트남의 오늘날은 투자자들의 주목대상이다. 인력이 우수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는 자부심이 경제에서는 어떤 성과를 거둘까. 기대된다.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