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하면서도 유교적 덕치주의 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덕치주의는 수신제가를 한 훌륭한 지도자가 나라를 잘 다스려 화평하게(치국평천하) 해주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그러나 세종대왕이나 링컨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얼마나 자주 나오겠는가. 서양사람들은 그같은 비현실적인 것을 기대하지 않고 어느 정도 유능한 인물이 통치를 하되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제도와 절차를 통해 견제해 놓고 있다. 우리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데 반해 그들은 실용주의적인 해결책을 찾은 셈이다.
덕치주의 사상의 영향은 우리의 바람직한 공직자상에도 나타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능한 공무원보다는 황희정승과 같은 청빈한 공무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 청빈을 강요한다면 아마도 공무원이 되겠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공무원들에게 청빈을 요구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우리 사회가 어느 한구석 예외없이 총체적으로 부패구조에 얽혀 있는 가운데 높은 사람들에게는 관대하면서 유독 중·하위직 공무원에게는 죄가 없어도 겁을 주는 사정관행이 유능한 공무원을 복지부동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 결과 공무원들이 지나치게 위축돼 생산성이 저하되지 않을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국민의 혈세 단 백만원이라도 부정하게 유용되는 것을 막으면 애국하는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사정에 임하는 애국충정은 좋지만 지나친 이상주의에 빠지면 안된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대다수 공무원들은 믿고 있다. 그러니 규정에 해주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는 한 민원인의 편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안해주려 한다. 해주고 나면 괜히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사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수사부터 시작해 죄를 찾아내는 식의 사정으로 국가의 녹을 받아 먹는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또다른 낭비를 가져온다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