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자본주의 미래 모습은

탐욕·머니게임에 시장 실패… "적절한 규제의 자본주의로"





인류 최고의 제도적 창안품이라 여겨지는 자본주의가 중대한 기로에 섰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이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면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인류의 미래를 맡겨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이 일고 있다. 강자의 탐욕에 주기적으로 약자의 생활기반과 꿈이 송두리째 파괴돼도 좋은 것인지, 실체도 없는 파생상품을 만들어 글로벌 금융시장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카지노 판'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국민들이 제 손으로 뽑지도 않은 소수 금융자본가들의 머니 게임에 매번 희생양이 되고서도 혈세로 그들의 부실을 메꿔줘야 하는지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문명화와 발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불필요한 탐욕을 적절히 통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게 됐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기를 맞아 과연 자본주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파이낸셜타임스(FT)는 12일 '자본주의의 미래(Future of Capitalism) 시리즈를 정리하면서 지난 30년간 세계를 지배해 왔던 미국식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야 할 처지가 됐다고 진단했다. 1980년대 이래 미국의 패권을 지탱해 온 레이거니즘으로 대변되는 영미식 자본주의는 정부 개입을 악으로 규정하고, 규제 완화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미화했지만, 그토록 믿었던 '시장의 실패'를 막지는 못했다는 것. 자유방임에 가까운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은 시장에 대한 정부개입을 강조한 케인지언(Keynesian) 모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왔지만,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는 지적이다. 신문은 "규제완화와 시장주의를 특징으로 한 영미식 자본주의는 자기 몰락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면서 "정부의 금융규제 강화 등을 특징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요약 정리한다. ◇ 아마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금융위기로 인해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지만, 스미스는 정작 이익을 극대화하는 시장 경제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표 저서인 도덕감성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등을 통해 '시장경제가 지고지순하다'든가 '자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금전적 이익과는 무관한 가치에 대해 폭 넓게 연구했다. 그 결과 스미스는 신중함(Prudence)이 가장 큰 미덕이며, 자비ㆍ관용ㆍ공공정신 등도 인간사에서 매우 유용한 미덕이라고 갈파했다. 다시 말해 스미스는 모든 분야에서 시장경제가 만능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장이 실패한 분야에서는 국가의 책임을 강조했다. 스미스의 이런 관점을 수용하면, 자본주의란 기본적으로 자유거래와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사회 안전을 위해 실업수당이나 연금이 필요하고 교육 및 의료분야의 공공성도 강화돼야 하는 체제임을 인정할 수 있다. 이번 금융위기를 맞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현 자본주의를 뒤엎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아니라 시장 경제의 능력과 한계에 대해 보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 키쇼르 마부바니 싱가포르 리콴유공공정책대학원 학장=아시아 국가들은 시장경제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도 미국이나 유럽 등과는 다른 독특한 자본주의 모델을 발전시켜 왔다. 지난 1990년대 말 아시아 국가들은 혹독한 외환위기를 겪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이 지역 경제는 이번 금융위기에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적게 노출됐다. 외환 위기 당시 외환 보유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달러 자산을 축적해 온 것이 현 시점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아시아 국가의 자본주의 모델은 창의성과 개혁의 관점에서 보면 부진한 면이 있으며, 부패를 낳는 정실자본주의로 변질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약점을 압도하는 다른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오너 체제의 기업은 단기적 이익에 몰두하기 쉬운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큰 그림을 그리며 기업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게끔 유인해 왔다. 이번 금융위기가 끝나고 나면 아시아 국가들은 세계 속에서 달라진 위상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은 이 같은 놀라운 약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독특한 자본주의 모델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역할 모델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역사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위험성과 겸양의 미덕을 잘 인식하기 때문이다. ◇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글로벌 금융위기는 글로벌한 해결책을 필요로 한다. 일례로 다른 나라와 공조하지 않은 유럽의 거시경제 정책들은 문제를 키웠을 뿐이다. 규제도 마찬가지다. 규제완화가 혁신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화를 바탕으로 각국이 규제없애기 경쟁을 벌였지만, 실제로는 투명한 정보와 건전하고 안전한 금융시스템을 담보하는 규제가 있을 때만이 혁신은 극대화된다. 현재의 세계금융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에 공평하지도 않다. 이들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상표가 붙은 금융위기의 억울한 희생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보다 더 나은 규제와 거시 정책들을 편 나라들조차 미국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 받는 상황이다. 우리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그 운영은 개별 국가들에게 맡겨 놓고 있다. 이 상태에서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고 문제가 있어도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 유럽과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21세기 글로벌 금융체제를 선도할 수 있는 방안을 찾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 개발도상국들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금융시스템, 오늘날의 현실을 반성하고 새로운 발전을 기약해 줄 금융시스템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는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전면적인 개혁도 포함된다. ◇ 마틴 울프 FT 칼럼니스트= 존 메이어드 케인즈의 사상이 빛나는 것은 그가 경제시스템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로 다뤄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점이다. 그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자유가 보장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자유방임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되리라는 것도 믿지 않았다. 시장은 생산적인 경제와 개인의 자유를 떠받치는 주춧돌이지만 심각하게 망가질 수도 있기에 신중하게 관리돼야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자본주의 경제는 의문의 여지없이 살아 남겠지만, 시장 중심주의에서 시장원칙과 정부 규제가 맞물리는 형태의 자본주의로 바뀔 수밖에 없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정부는 미국과 전세계가 당면한 글로벌 경제위기에 실용적 해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케인즈가 주장하듯 총수요를 유지하는 과제에 매달려야 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수요 균형을 조정하는 문제도 신경써야 한다. 지난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현재의 위기에 실용적으로 공조해 대처해 나가느냐, 아니면 이념에 매몰된 자들의 선동과 이기심이 우리를 방해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목표는 분명하다. 가능한 한 많은 인류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개방되고 적절한 안정성을 갖춘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 앨런 그리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금융위기를 통해 얻은 교훈 중 하나는 도취(Euphoria)와 공포(Fear)가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시장에서 위기를 완벽하게 예측할 모델은 없다는 것이다. 과거를 아무리 연구해도 역사적으로 저평가된 리스크가 수년간 지속될 수 있음이 여러 차례 증명됐다. 지난 1996년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 대해 경고했지만 결국 닷컴 버블이 발생했고, 2002년에도 모기지 채권 증가에 따른 예외적인 주택시장 붐이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주택 버블은 2006년까지 이어졌고 결국 지난해 파국이 왔다. 개인적인 경험상 현재 감독하고 조사해야 할 것은 결국 불확실한 미래 예측을 요구하지 않는, 예방적인 규칙들이다. 자본투자를 더욱 생산적으로 하고, 결과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새로운 규제를 옹호할 필요가 있으며, 이와 동시에 통제와 보호가 아닌 자유경쟁이 우리 세대를 성공시킬 또 하나의 자산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 에드문트 펠프스 컬럼비아대 교수=일부 유럽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종말'은 사리에 맞지 않다. 미국 금융 산업에 문제가 생겼고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규제기관이 아닌 금융업계의 자제력 부재도 실패의 원인이다. 따라서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라 금융계 전체의 새로운 마음가짐, 즉 도덕적 자기정화가 무엇보다 요구된다. 금융시장을 보다 많은 부를 얻기 위한 '머니 게임의 장(場)'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 영향력과 공공성에 대해 깊이 인식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새로움 금융 시스템이 재구축될 것이다. 앞으로 금융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감독과 규제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가 불필요한 영역까지 파고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상업은행이 과거 투자은행의 영역이던 파생상품 투자에 몰두한 것과 같은 행태는 막아야 하지만, 벤처 기업 투자와 같은 영역에서는 규제를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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