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아베의 입 세계가 주목

우호적 분위기 틈타 '과거사' 물타기 예상 속
일부 美의원 "사과하라" 연판장 돌리며 압박
반둥회의 처럼 두루뭉술 넘길 땐 후폭풍 클듯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이번 방미 일정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못지않게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바로 29일로 예정된 상·하원 합동연설이다. 군사·경제적 동맹 강화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틈을 타 그가 미 의회 연설이라는 상징적 행사를 통해 과거사 물타기에 나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과거사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 없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공세를 어물쩍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에 대해 따끔하게 충고해온 미국도 당장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시급한 사안에 일본의 지원이 절실한 만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잘잘못을 냉정하게 지적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최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등 중국의 세력확대에 위협을 느낀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맞서 동북아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존 케리 국무장관 등 미국 정부 관료들이 잇따라 아베 총리를 직·간접적으로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역사 문제를 덮고 갈 우려가 확산되면서 그를 압박하는 미국 정치권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3일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 민주·공화당 의원들은 연판장을 돌려 아베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에드 로이스 민주당 하원 외교위원장과 마이크 혼다 민주당 의원 등은 "아베 총리는 역사를 직시하고 무라야마 담화와 고노 담화를 공식적으로 재확인하고 인정하라"는 연명 서한을 작성,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 일본대사에게 전달했다.

이번 서한은 아베가 오는 29일 상·하원 합동연설 때 반드시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초당파적 차원에서 의회가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연명 서한에는 아베의 의회 합동연설을 허용한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소속된 공화당 의원들도 대거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현지의 한 소식통은 "위안부 문제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주도해온 이슈지만 로이스 위원장을 포함한 공화당 의원들도 이번 기회에 과거사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나름대로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29일 의회 연설에 나서는 아베 총리의 입에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 정치권 등은 연설에서 아베가 미국에는 사과하되, 주변국에는 두루뭉술한 반성의 뜻을 표하는 언급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연설의 예고편 격이었던 지난 22일 반둥회의 연설에서 아베는 "과거 전쟁 행위를 반성한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과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둥회의에서 그는 잘못을 인정하는 핵심단어인 '식민지배'와 '침략'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아베가 반둥 때와 같은 수준에서 과거사 문제를 가볍게 넘어간다면 예상치 못한 후폭풍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에 따라 아베가 막판까지 여론을 주시하면서 최종 연설문을 다듬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한 소식통은 "아베 총리의 과거사 언급에 대한 주변국과 미국 내 지식인들의 기대치가 높지는 않은 편"이라며 "하지만 아베 총리로서는 다시 연설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