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교육정책의 재앙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가짜 박사학위가 사회 문제가 되고는 한다. 미국 등지에서 제대로 코스를 밟지 않고 적당히 돈 주고 산 학위로 행세를 하다 들통이 나 망신을 당하는 일도 그런 경우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정작 학위장사를 하는 엉터리 대학이 있는 미국 현지에서는 가짜 학위가 사회 문제가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학위장사를 위해 버젓이 광고를 해도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서슬 시퍼런 교육 당국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미국 연방정부에도 교육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늘 국민의 관심 밖이다. 학교와 학생 수 같은 교육 관련 통계자료 정도나 챙기는 게 고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권한이 없다. 당연히 입시정책이니 교육정책이니 하는 거창한 업무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미국의 교육경쟁력은 세계 최강이다. 대학은 뽑고 싶은 학생을 선발하고 학생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가고 싶은 대학에 가면 그만이다.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원리에 따라 교육제도가 작동하는데도 최고의 인재를 길러낸다. 입시나 교육을 둘러싼 혼란과 갈등도 없고 대학이 학생을 뽑을 때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는 토익ㆍ토플도 민간기업이 담당하고 있지만 시빗거리가 안 된다. 이렇다 할 교육정책이나 강력한 규제자도 없지만 학생ㆍ학부모ㆍ대학, 그리고 인재를 쓰는 기업 모두가 만족하는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미국 교육제도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눈을 한국으로 돌리면 전혀 다른 살벌한 풍경이 펼쳐진다. 골치 아픈 내용은 잠시 밀쳐놓으면 갈등ㆍ혼란ㆍ불만ㆍ불신ㆍ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 한국 교육제도의 특징이다. 국민 모두가 교육전문가 뺨칠 정도로 교육은 만인의 관심사이자 불만의 대상이다. 당사자인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학부모ㆍ대학, 그리고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를 채용하는 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교육에 대해 만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교육 서비스의 수요자인 학생은 단순한 불만의 차원을 넘어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측은한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정권 교체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재임기간이 채 일년도 안 되는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ㆍ교육정책이 춤을 추니 알량한 정책의 실험 대상이 됐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다. 수십년 동안 뜯어고치고 땜질을 되풀이해온 결과 자신의 실력이면 어떤 대학을 갈 수 있는지 전혀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입시제도가 난해해져버렸다. 대학 입시제도를 이해하려면 전문가한테서 과외를 받아야 할 정도라니 그 고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광적인 교육열에 불타는 학부모들의 고충도 다를 바 없다. 공교육을 믿을 수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해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경제에 왜곡이 생길 정도로 사교육비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조기유학 행렬이 길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법석을 떨고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결과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교육경쟁력의 국제 비교에서 한국은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1위권의 경제력에 걸맞은 세계적인 대학도 없다. 대졸자를 채용해 엄청난 재훈련비를 들이는 기업들은 대학이 불량품을 생산해놓고 애프터서비스도 안 해준다며 못마땅해 한다. 불만은 불균형이고 불안정이다. 다수가 불만인 불안정한 상태는 오래갈 수 없다. 내신정책만 해도 대학에서는 차라리 정부가 학생을 대학에 배정해주는 학생배급제를 하라는 항변이다. 학생의 지적능력과 교육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되는 시시한 일로 엄청난 에너지를 탕진하는 소모적인 갈등과 혼란이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 된다. 대학은 뽑고 싶은 학생을 선발하고 학생은 자신의 실력과 적성에 맞게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해법이다. 정책을 안 하는 것이 최선의 정책임을 미국의 교육제도는 보여준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