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포용전술의 한계

북한의 핵실험 발표 후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말은 ‘쓸데없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불필요한 인정을 베풀다가 큰 피해를 자초한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초(楚)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참모 한 사람이 양공에게 “적이 강을 반쯤 건너왔을 때 공격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양공은 “그것은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며 진언을 물리쳤다.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온 후 진용을 정비하자 “진용을 가다듬기 전에 적을 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권유가 나왔지만 양공은 “군자는 남이 어려울 때 괴롭히지 않는 법”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이 싸움에서 송나라는 대패했고, 양공도 큰 부상을 입고 죽고 만다. 전세계 대북 ‘봉쇄정책’ 채택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에 대한 불신과 조롱이 팽배하다. ‘퍼주기’라는 비난까지 감수해가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건만 북한은 핵무기 카드를 꺼내들었다. 유엔 안보리는 지난 14일 경제적ㆍ외교적 제재를 내용으로 한 대북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전세계가 북한에 대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결의한 셈이다. 그러나 국내 사정은 딴판이다. 핵실험 발표 직후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포용정책 재검토 필요성’을 밝히더니 불과 몇 일 만에 정부와 여당 내부에서는 “포용정책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목소리가 우세해지고 있다. 오히려 ‘미국 책임론’이 강조되는 모습이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만을 놓고 보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주요한 대외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가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인데 북한은 보란 듯이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렇다고 해서 “포용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런 주장은 깡패들에게 돈을 뜯긴 것으로도 모자라 몰매까지 맞은 노점상이 “그래도 죽지는 않았으니 ‘성공’…”이라고 자위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론상으로 따져도 포용정책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포용은 가변성이 높은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전술’일 뿐 ‘정책’이 될 수 없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정책’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면 의사결정 주체가 원하는 목표를 합리적으로 추구, 실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포용정책은 그게 어렵다. 이는 포용정책이 보편성이 떨어지는 가정을 전제로 삼고 있는데다 정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단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용의 속성은 ‘확대 재생산’ 포용정책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함으로써 상대방이 보편적인 인식이나 행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은 망나니짓을 일삼더라도 따뜻하게 대해주면 언젠가는 사람 노릇을 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대응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상대도 나름이다. 아무리 잘 해줘도 변하지 않는 상대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직전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독일의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양보를 거듭했지만 히틀러는 끝없는 영토욕심을 채우기 위해 결국 전면전을 일으키고 말았다. 포용정책의 더 큰 문제는 실효성을 담보해줄 장치가 없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계속 엇나가더라도 달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포용정책의 효과를 높이려면 포용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루스벨트는 스탈린 같은 꼴통을 상대로 포용정책을 펴다가 엄청난 스트레스와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는 포용전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최소한 상대의 변화를 전제로 당근을 제시하는 ‘상호주의’나 ‘포용 및 봉쇄정책 병용(congagement)’을 채택해야 할 시점이다. 더 이상 포용만을 고집한다면 북한을 맹주(hegemon)로 받들어 모시는 ‘숭북(崇北)’이나 ‘사대(事大)’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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