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4월 29일] 근혜공주 몽준왕자 그리고 민심
부국장대우 문화레저부장 홍현종 hjhong@sed.co.kr
한국 정치에서 민심이란 때로는 절묘할지 몰라도 크게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몇 안 되는 국회의원다운 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의 의원 배지를 떼버린 건 민심이었다.
“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노동귀족과 서민배우 아들의 대결이었지요.”
서민 대 귀족의 대결이라는 상대 측의 집요한 구호에 대한 맞대응이었겠지만 의정활동의 모범사례가 돼온 노회찬을 노동귀족으로,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자신을 ‘서민’이라고 외치는 홍정욱 당선자의 주장은 어쩐지 듣기 거북한 말의 유희로 들린다. 어쨌든 서민층 민심은 예상을 깨고 스스로 ‘일생에 져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유명배우의 잘생긴 아들을 국회로 보냈다. 정치적 능력이 우선이라는 통상의 정치공식과는 어쩐지 멀어진 결과들을 민심은 이번 선거에서도 적잖이 만들었다.
2세 체제로 넘어가는 정치경제 질서
대중 눈치 보기에 익숙한 이 나라 언론과 정치판에 일종의 금기 같은 관례가 숨은 탓인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민심이란 단어 뒤에는 으레 근사한 수식만이 따른다. 예측을 불허하고 변덕스러우며 때로는 선정적 구호에 부화뇌동하는 것 또한 민심의 속성이다. 때로는 여론조작 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들의 이해(利害)를 따라 방향을 틀기도 한다.
서민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탄생한 정권을 바로 그들 계층을 앞장세워 몰아내는 재주를 부린 건 대한민국 수구언론이다. 정보 왜곡의 ‘선수’인 그들 머릿속의 민심은 휘어지고 쏠리는 대상으로서의 민심이다.
이 나라에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이나 좋은 소리 듣기 어렵다는 재벌과 정치인들. 그런데 이들 기득권 그룹들이 구축하는 인적 구조에 박수치며 특히 그 후계자들에게 열광하는 것도 민심이다. 민심의 이중적 성향을 보여주는 흥미 있는 사례다.
근혜공주와 몽준왕자. 대한민국 기득권층 중에서도 세습된 기득권자인 이들을 향한 민심의 열기는 가히 종교가 부럽지 않다.
어떤 점이 근거일까. 이해의 난이도는 박근혜보다는 정몽준 쪽이 더 높다. 이번 총선에서 보여준 정몽준의 힘, 대단했다. 대선 전국 600만표를 얻은 정동영을 간단히 눌러버렸다. 당권, 차기 대선후보군에서도 선두권이다.
그를 향해 커지는 민심의 기대감. 그런데 그 근거가 딱히 손에 잡히지 않는 데서 퍼즐은 난해해진다. ‘김대중의 경륜, 노무현의 개혁, 이명박의 실적, 정몽준의 ?’ 대한민국 최고 타이쿤의 3조원 재산을 가진 아들, 대한축구협회회장이란 점 외에 그의 리더로서의 브랜드는 무엇인가. 민심은 변덕스러운 것. 대표 브랜드의 실체가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정몽준의 인기가 언제까지 치솟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비한다면 박근혜는 포인트가 또렷하다. 선친에 대한 종교적 향수를 제치더라도 그가 쌓아온 정치적 내공, 그리고 무엇보다 ‘박근혜표’ 신뢰가 그 이유다. 그가 입을 열면 진실처럼 믿기는 말의 무게와 정서적 안정감은 박근혜의 가장 큰 정치적 장점이다. 그렇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것만이 전부일까. 뭔가 성에 차지 않는다. 부국강병을 구호로만 외칠 뿐 그가 제시하는 정치경제적 비전은 여전히 모호하다. 대중들 손에 잡힐 수 있는 정책적 비전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한다면 박근혜 신드롬도 민심의 비이성적 현상의 결과로 치부될지 모를 일이다.
여론이 최종 감시자 돼야
1세대에서 2세대로, 정치에서 경제로 권력의 지도가 재편되는 시대. 선대의 후광 속 신분세습, 그리고 공고해져가는 기득권층 커넥션 위주의 정치경제 질서에 무조건 태클을 거는 게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구조 속에 포진한 신진세력들의 자질과 능력, 자정(自淨)성,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향한 민심의 분별 및 검증이다.
여론조작 세력에 속지 않는 민심의 날카로운 눈이야말로 적절치 않은 신분의 세습화와 그에 따른 승자독식의 잘못된 구조를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다. 그런 면에서 민심도 이제는 자아비판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릇된 판단에 대해 구성원 개개인의 책임의식이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