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벌정책의 경제논리

재벌개혁은 박정희정권을 포함한 역대 정권에서 매번 칼을 빼들었으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없어 실패했다. 그러나 재벌 다스리기가 실패한 더 큰 이유는 대기업집단의 공이 과보다 더 크다는 논리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유례없는 고도성장기에 진화론적으로 태동한 재벌은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있어 일등공신이었다. 세계시장에서 반도체 1위, 조선 2위가 대표적인 재벌그룹의 성적표이다. 따라서 대기업군은 물론이고 일부 경제학자들까지도 신재벌정책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본다. 경쟁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에 의해 자원배분이 이루어진다는 전통적인 현대경제학의 경제논리를 가지고 신재벌정책을 설명하는 것은 사실 궁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이 신재벌정책을 반대하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차제에 신재벌정책의 경제논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신재벌정책의 뿌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정책기조에서 찾아야 한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이념은 인본적 자유주의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진정한 시장경제를 세우기 위한 원리로서 질서자유주의와 휴머니즘에 입각한 공동체원리를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질서자유주의란 시장의 경쟁질서가 정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공동체원리는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진 시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이념으로서 제도개혁을 이룰 수 있는 문화적·정치적 기반이 된다. 다음으로 신재벌정책은 신제도학파의 논리로 설명될 수 있다. 신제도학파는 가격에 의한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진다는 전통적인 시장균형이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제도와 조직이 자원배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의 틀 안에 끌어들이고 있다. 여기서 제도는 운동경기의 규칙, 즉 게임의 룰이며 조직이란 경기에 임하는 경기팀으로서 기업·정부와 같은 경제주체의 구체적인 형태를 말한다. 제도는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과 경제적 성과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준다. 그리고 거래비용을 줄이고 조직의 효율성을 이룰 수 있는 구조조정의 메커니즘이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 시장·기업·금융 등의 제도적 발전은 경제성장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본다. 다음으로 신재벌정책은 후쿠야마 교수의 사회적 자본가설로도 설명될 수 있다. 사회적 자본이란 경제주체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력함으로써 형성되는 인적자본의 한 요소로서 사회적 자본의 축적이 많을수록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특히 혈연·지연·학연 등의 연고를 뛰어넘는 경제주체들의 신뢰성 제고가 중요하다고 보며 연고주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은 경제침체와 사회적 퇴보를 초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공적인 시장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잘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적 자본, 즉 신뢰관계가 충분히 축적되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재벌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신뢰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가 된다고 본다. 그동안 국민들의 불신으로 얼룩진 대기업그룹의 건전성과 투명성을 회복하는 길이 바로 우리 경제의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방편이 되며 사회적 자본의 형성 없이는 선진경제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21세기 지구촌경제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현시점에서 운동장이 커지고 경기규칙이 달라졌으며 상대방 선수들의 실력이 전보다 월등히 강해졌다. 이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불편하고 힘들어도 새로운 게임 룰을 익히고 체력을 보강하고 단련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경기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이 훌륭한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믿을 수 있는 심판이 있어야 하며 반칙과 파행을 용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질서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제도와 조직을 만들고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것이 신재벌정책의 논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주: 더 자세한 설명은 본원 발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참고) 이선(산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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