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성지 향하는 순례자처럼… 새벽부터 입장 행렬

■ 순교 124위 시복식
"선조들 물려준 애덕의 유산, 보화로 잘 지켜나가기를"
5분간 짧은 퍼레이드였지만 신도들 "긴 여운으로 남아"

"막대한 부요(부유함)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해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미사에서 "지난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한다"며 그들을 기렸다. 그렇게 강론을 마치고 1분여의 침묵 기도. 늘 자동차와 사람들로 시끄럽던 광화문에 숙연한 공기가 가득했다.

◇새벽부터 기다린 지방 신도들=광화문 시복식 행사장을 향하는 새벽3시30분, 아직은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 아직 가로등이 켜진 광화문 거리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서로에 의지해 어두운 길을 걸어갔다. 성지를 향해 새벽부터 길을 재촉하는 순례자처럼.

제주교구에서 전일 올라왔다는 박대건(55·베드로)씨는 "어제 서울역 근처 숙소에서 다 같이 자고 새벽3시에 나왔다. 제주교구에서만 전체 교구신도 6,000명 중 2,000명 정도가 올라왔다. 서울 아니라 더 멀어도 왔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날 행사장에 새벽4시부터 입장하기 시작한 신도들은 각 교구별로 앉아 성경을 읽거나 찬송가를 부르며 교황을 기다렸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많아 여기저기 잠을 청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광장 밖 세종문화회관과 다른 빌딩에는 입장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거기서 밤을 새운 듯 돗자리와 담요를 덮고 교황과의 만남을 준비했다.

◇5분 위해 5시간 기다린 '짧은 만남 긴 여운'=9시 즈음 프란치스코 교황이 도착하면서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40여명의 경호원이 교황을 둘러싼 가운데 '포프모빌'이 퍼레이드를 시작했고 교황은 10여명의 아이들을 축복했다. 그렇게 5분, 이 시간을 위해 행사장과는 먼 시청 앞에서 5시간 가까이 기다려온 사람들은 교황이 지나가고서도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펜스 앞에 바짝 붙어있던 한 신도는 '짧은 만남 긴 여운이네'라며 웃었다.

경찰 추산 80만명이 모인 행사에 불편함이 없을 수 없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크게 항의하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교황의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시청광장과 시복식이 열리는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간이화장실은 턱없이 부족했다. 오전8시께 시청광장 간이화장실에는 8칸 중 7칸을 여성용으로 배정했지만 500여명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시청광장 인근 수도에서 물이 흘러나와 바닥에 앉아 있던 신도들이 불편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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