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과거사 반성 '재심' 논란 번지나

재심요건 '너무 엄격' vs 법적 안정성 '위협'

이미 확정된 판결에 대한 재판을 다시 하는 `재심(再審)'이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 움직임과 맞물려 사법부와 정치권의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26일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재심 사유의 완화 필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 이은영 열린우리당 의원이 재심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나서는 등참여정부 출범 이후 계속된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이 사법부로도 옮아가는 인상이다. 재심은 국가정보원이나 경찰청 등 현재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 중인 기관의 자체 조사와는 달리 이미 사법적 판단이 끝난 사항에 대한 재판단이라는 점에서법적 안정성 문제와 직결돼 있고 적잖은 논란을 불러올 여지가 많다. 그러나 재심 허용과 관련된 현행 대법원 판례가 너무 엄격해 사실상 모든 재판의 재심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아 정치권의 재심 특별법 논의와별도로 대법원의 전향적 태도가 요청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까다롭기만한 재심 사유 = 현행법상 허용되는 재심사유는 7가지다. 형사소송법상 허용된 대표적 재심 사유는 원판결의 서류ㆍ증거물ㆍ증언ㆍ감정ㆍ번역이 위조ㆍ변조됐거나 원심의 증언이 무고였다는 사실이 확정판결로 증명됐을 때,경(輕)한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을 때, 수사 및 재판에 관여한 법관ㆍ검사ㆍ경찰이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등이다. 이 중 이미 확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재심을 청구하면서 가장 빈번하게 드는사유는 `원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경한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을 때'라는 규정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조항의 의미에 대해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라 함은그 증거가치가 원판결의 증거보다 경험칙이나 논리칙상 객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보여지는 증거를 말하며 법관의 자유심증에 의해 증거가치가 좌우되는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판례를 형성하고 있다. 쉽게 말해 법관이 새로운 증거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원심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죄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명백한 증거가 제출돼야 한다는 의미로, 이 경우 재심이 받아들여지면 100% 무죄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재심 청구인이 이 정도의 증거를 찾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판례는 사실상 재심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인 셈이다. ◇ 판례 원용한 일본도 판례 변경 = 우리나라 대법원이 취하고 있는 재심 개시사유에 대한 판례는 대부분 일본 판례를 원용했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일본 최고법원은 1970년대 이후 엄격한 재심 요건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제기돼 1975년 기존의 판례를 변경하면서 현행 우리나라 대법원과 대동소이했던 재심 사유를 대폭 완화했다. 일본 최고법원이 새로운 증거가치의 명백한 우위라는 입장을 포기하고 재심을청구하면서 새로운 증거가 제시됐을 경우 이 증거를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원판결의 증거와 종합적으로 비교ㆍ평가해야 한다는 판례를 내놓은 것. 결과적으로 우리 대법원이 재심 개시사유를 판시하면서 참고했던 일본은 1975년이 입장을 포기했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의 판례 변경이 이뤄진 지 30년이 지나도록과거 판례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김갑배 변호사는 "재심 개시 요건이 너무 엄격해 재심에 의해 무죄가 가능한 사건이 재심은커녕 재심 개시조차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상당한 증거가치가 인정되면 재심의 기회가 부여되도록 기존 판례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재심, 과거사 반성의 키 되나 = 이용훈 대법원장은 취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사 반성 방법 중 하나로 재심을 거론했지만 "재판에 관한 문제라서 대법원판결로 결정할 문제"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을 유난히 강조했고 곧바로 법원 행정처가 권위주의 시절 판결문 수집에 들어가는 등 발빠른 행보에 비춰기존의 재심 판례가 변경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예상이다. 다만 이 대법원장은 과거 공안ㆍ시국사건의 재정리를 염두에 뒀지만 재심을 무한정 허용한다면 일반 형사사건의 무분별한 재심 청구가 있을 수 있고 확정판결의재판단에 따른 법적 안정성 위협 우려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법원의 자체적인 판례 변경 가능성과 별도로 이은영 열린우리당 의원이 군사 독재시절의 사법부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재심특별법 제정 및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경우에 따라 정치권이 나설 수 있다는 뜻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재심특별법을 제정하더라도 개시 요건과 대상을 엄격히 해야 하며 정치권의 일방적 추진에 따른 재심사유 허용은 적절하지 못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또한 열린우리당은 과거사위원회가 내린 결정을 법원이 수용토록 하는 방향으로과거사기뻘萱?개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자칫 사법부의 독립을 크게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논란도 예상된다.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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